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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 옆 달력에는 영어 일정이 꽤 많이 적혀 있었다.

    스피치, 리딩북 반납, 단어 확인, 숙제, 학원.

    내 눈에는 잘 정리된 달력이었다. 빠뜨리지 않고 챙기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딸이 그 달력을 한참 보더니 손가락으로 칸을 하나씩 지나갔다.

    스피치가 적힌 칸도 아니었다.

    리딩북 반납일도 아니었다.

    손가락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토요일 오후에서 멈췄다.

    딸은 그 빈칸에 하트를 하나 그렸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는 그냥 노는 시간.”

    나는 그 말을 듣고 달력을 다시 봤다.

    내가 중요하다고 적어놓은 건 전부 글자가 있었는데, 딸이 가장 먼저 고른 곳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내게는 빈칸이었는데 딸에게는 이미 일정이었다

    사실 토요일 오후에도 넣어볼 생각을 했던 게 있었다.

    스피치를 한 번 더 볼 수도 있었고, 리딩북을 읽을 수도 있었고, 단어를 확인하거나 다음 주 숙제를 조금 먼저 해둘 수도 있었다.

    평일을 생각하면 나쁜 계획은 아니었다.

    주말에 조금 해두면 월요일부터 덜 바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달력에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곳을 보면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시간처럼 봤다.

    그런데 딸은 다르게 봤다.

    아무것도 없는 칸을 보고 비어 있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노는 시간이라고 먼저 이름을 붙였다.

    그 차이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달력에는 한 단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길었다

    달력에는 스피치라고 짧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당일 몇 분만 쓰는 일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연습해야 했다.

    리딩북 반납도 책을 가방에 넣는 날만 뜻하지 않았다. 그전에 읽어야 했다.

    단어 확인도 달력에는 네 글자였지만 집에서는 그보다 시간이 더 들었다.

    그걸 매일 하면서도 나는 달력에 적힌 글자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딸이 토요일 빈칸에 하트를 그린 뒤에야 일정 하나가 차지하는 시간이 달력 한 칸보다 크다는 걸 다시 보게 됐다.

    그래서 그 주 토요일 오후에는 원래 넣으려던 공부를 넣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단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딸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과자를 먹으면서 자기 시간을 보냈다.

    그 뒤로 모든 토요일을 비운 것은 아니다

    이 일을 겪었다고 우리 집이 그 뒤로 매주 토요일 오후를 비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토요일에는 다시 수업도 생겼고 운동 일정도 생겼다.

    그래서 이 경험을 두고 아이는 주말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집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

    다만 달력을 짤 때 내가 한 가지를 다르게 보게 됐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칸이 반드시 아직 채우지 못한 시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에게는 빈칸이어도 아이는 이미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었다.

    그날 딸은 토요일 오후에 하트 하나를 그렸다.

    나는 그 칸에 적으려던 영어 일정을 그 주만큼은 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달력에서 가장 정확하게 적힌 일정은 딸이 직접 붙인 이름이었다.

    “그냥 노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