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책만 펼치면 세 줄을 못 넘기고 눈이 감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공도 한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알면서도 못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딸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조금 이해하게 됐습니다.

읽기 자동화보다 먼저 챙겨야 할 것
제 딸아이에게 갓난아기 때부터 책을 읽어줬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학창시절 읽은 책보다 아이에게 읽어준 책이 훨씬 많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좋다고 하니까 읽어줬는데, 읽어주다 보니 아이가 반응하는 책이 있고 아닌 책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무서운 내용이 나오면 잔뜩 긴장하고, 우스운 장면에선 깔깔 웃더군요. 어린아이도 분명히 책의 재미를 느낀다는 게 제겐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서 교육 이론에서는 초등 1, 2학년을 독서 준비기라고 부릅니다. 독서 준비기란 아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에 두 가지 핵심 도구를 갖추는 시기를 말합니다. 첫 번째가 읽기 자동화입니다. 읽기 자동화란 버스 안에서 지나가는 간판을 보면 읽으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글자가 읽히는 상태, 즉 표음 문자에 완전히 숙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게 안 되면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읽기 자동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독서 흥미도입니다. 독서 흥미도란 아이가 책 자체에 대해 가지는 호감과 관심의 정도를 말합니다. 읽기 자동화가 됐더라도 책이 싫으면 결국 읽지 않습니다. 제가 딱 그 케이스였습니다. 글자를 읽을 줄 알았지만, 책을 펼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많은 부모님들이 이 준비기에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초등 3학년 이후 독서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현상이 관찰되는데(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이는 그 이전 단계에서 무리한 독서 지도가 쌓인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라톤 시작 전 준비 운동에서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과 같습니다.
읽기 자동화 속도는 아이마다 크게 다릅니다. 1학년 1학기에 완성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2학년 2학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도가 이후 문해력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걸음마를 몇 개월에 시작했느냐가 성인의 달리기 실력과 무관한 것처럼요.
이 시기에 부모가 챙겨야 할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읽기 자동화를 2년 안에 자연스럽게 이루도록 환경을 만든다
- 독서 흥미도를 떨어뜨리는 무리한 낭독 지도나 강제 독서를 피한다
- 아이가 책을 고르는 경험 자체를 충분히 쌓게 해준다
책 고르기가 독서의 진짜 출발점
아이에게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어주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제가 재밌다고 생각한 책을 읽어줬을 때 아이가 별 반응 없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반면 별 기대 없이 펼친 이상한 그림책에서 아이가 배를 잡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좋아하는 책이 아이에게 재밌을지는 직접 읽어줘봐야만 알 수 있다는 걸 일찍 받아들였습니다.
독서는 본질적으로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읽는 문화 생활입니다. 여기서 독서 편식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독서 편식이란 아이가 특정 분야의 책만 읽고 다른 분야는 읽지 않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개념 자체가 독서의 속성과 맞지 않습니다. 문화 생활을 할 때 "월요일은 필라테스, 화요일은 미술, 수요일은 음악"처럼 균형 있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이 곧 올바른 독서입니다.
여기서 문해력이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며 활용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수준 높은 책을 억지로 읽히면 문해력이 올라간다고 믿는 분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아이가 버거운 책을 읽을 때 벌어지는 일은 '이해'가 아니라 '글자 읽기'입니다. 맥락이 끊어진 채 글자만 통과하면 독서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독서 효과는 몰입해서 읽을 때, 즉 내용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일 때 발생합니다.
뇌 과학 연구에 따르면 글책을 읽을 때 뇌가 전체적으로 활성화되는 반면, 학습 만화를 읽을 때는 영상을 시청할 때와 유사한 수준으로 뇌 활성화가 낮게 나타납니다(출처: 한국뇌연구원). 학습 만화를 독서와 동일하게 취급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쉬는 시간에 보는 것은 막을 이유가 없지만, 독서 시간에 학습 만화를 들고 오면 분명히 경계를 세워줘야 합니다.
제가 느낀 가장 좋은 방법은 주기적으로 도서관에 가서 아이가 스스로 책을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엔 부모 눈에 "이게 뭐지?" 싶은 책을 들고 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경험이 쌓여야 독서 감각이 생깁니다. 독서 감각이란 책 표지나 목차만 봐도 자신에게 맞는 책인지 직감적으로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감각이 생긴 아이는 책을 고를 때마다 재밌는 책을 만날 확률이 높아지고, 그럴수록 더 많이 읽게 됩니다.
부모가 계속 책을 골라줬던 아이는 초등 중학년이 되면 스스로 책을 고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재밌는 책 골라봐"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릅니다. 재밌는 책이 어떤 건지 자신만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독서를 제대로 시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거창한 독서 계획이 아닙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 한 권을 찾아 내밀고, 도서관에 정기적으로 데려가 직접 고르게 하는 루틴을 만드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제가 못 만들었던 그 루틴을 딸아이에게는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독서를 좋아하게 되는 건 타고나는 게 아니라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도서관에 한번 같이 가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