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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영어책을 펴놓고 본문은 보지 않은 채 페이지 구석만 한참 보고 있었다.
작은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딸은 글자를 따라가지 않고 그 동물이 다음 페이지에도 있는지 찾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보다가 한마디 할 뻔했다.
“본문을 봐야지.”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을 바로 못 했다.
갑자기 내가 초등학생 때 했던 방학 숙제가 생각났다.
나는 친구 독후감을 베껴서 방학 숙제로 냈다
나는 어릴 때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글자를 못 읽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책 한 권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게 어려웠다.
책을 펴도 몇 장 지나지 않아 다른 생각을 했고, 방학이 되면 독후감 숙제가 제일 싫었다.
당시 방학 숙제로 일기 서른 편과 독후감 서른 편을 써야 했던 기억이 있다.
일기도 밀렸지만 독후감은 더 막막했다.
책을 읽지 않았으니 쓸 게 없었다.
그러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가 써놓은 독후감을 봤다.
어린 내 눈에는 정말 잘 쓴 글처럼 보였다.
결국 그걸 빌려 베껴서 내 숙제로 냈다.
선생님께 크게 혼났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보다 독후감 숙제를 어떻게 끝낼지가 더 중요했다.
책은 나에게 이야기를 만나는 물건이라기보다 숙제를 만들기 위해 먼저 통과해야 하는 일이었다.
딸에게 “본문 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그 기억이 떠오르니 딸이 보고 있던 영어책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나는 딸이 책을 잘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마음이 더 크다.
그래서 영어책을 펼쳐놓고 본문 대신 그림만 보고 있으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영어 문장을 읽었으면 좋겠고, 한 페이지를 펼쳤으면 내용도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날 딸은 책에서 빠져나가 딴짓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페이지 구석에 있는 작은 동물을 찾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도 그 동물을 찾았고, 표정이 달라진 것도 보고 있었다.
내가 그냥 지나쳤을 그림이었다.
그 순간 내가 “본문 봐”라고 말하면 딸이 보고 있던 것을 멈추고 내가 보고 싶은 곳을 보게 만드는 셈이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딸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내가 먼저 따라가 봤다.
내가 못 읽은 만큼 딸이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내가 책을 많이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딸이 책을 좋아하면 반갑다.
영어책을 스스로 펼치고 있으면 더 욕심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에 없었던 것을 딸에게 많이 채워준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독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책을 못 읽고 자란 후회와 딸이 지금 책을 보는 방식은 따로 봐야 했다.
내가 독후감을 베껴 냈던 이유는 책을 너무 천천히 읽어서가 아니었다.
그림을 오래 봐서도 아니었다.
나에게 책이 이미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더 강하다.
그래서 딸에게 책을 많이 읽히겠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한 번씩 나를 먼저 보려고 한다.
지금 이 말을 아이에게 필요한 말이라서 하려는 건지, 아니면 내가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 대신 시키고 싶어서 하려는 건지.
그날 영어책 구석의 작은 동물을 따라가던 딸에게는 “본문 봐”라고 말하지 않았다.
딸은 잠시 뒤에도 그 동물을 찾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같이 찾아봤다.
책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책을 싫어했던 방식으로 딸의 책 읽기를 만들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조금 더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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