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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에 취향책들이 있는 장면

어느 주부터 딸은 리딩북을 가방에서 꺼내도 책상 위에 바로 펼치지 않았습니다. 손끝으로 표지만 슬쩍 밀어두고 물을 마시러 가거나, 연필을 괜히 깎았습니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주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어려워서 피하는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책이 자기 쪽으로 당겨오지 않는 얼굴에 가까웠습니다.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나서 한동안은 원 수업과 리딩북만 챙기면 충분해 보였습니다. 수업도 있고 숙제 책도 나오니, 집에서는 그걸 확인만 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고 나니, 집 책장에 정작 딸 것이 한 권도 없다는 게 보였습니다. 전부 원에서 내려온 책, 해야 할 책뿐이었습니다.

책이 자기 쪽으로 안 당겨오는 얼굴

Reading Rockets의 독서 동기 안내는 아이의 흥미에 맞는 책과 직접 고를 기회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난이도보다 흥미가 언제나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려 합니다. 우리 딸에게서는 시켜서 펴는 책과 자기가 보고 싶어 꺼내는 책의 표정이 달랐습니다. 숙제 리딩북 옆에도 딸이 먼저 고르고 싶은 책을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양을 늘리는 대신, 책장에서 딸이 먼저 손 뻗을 만한 책을 찾기로 했습니다. 많이 사두기보다, 자기 쪽으로 당겨올 책 몇 권을 손 닿는 자리에 두는 일이었습니다.

책장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음원을 들려줄 때도 오래 틀었는지보다 딸이 어느 부분을 흥얼거리는지를 봤습니다. 많이 들려준 것과 아이가 익숙해진 건 다른 말이었습니다. 오래 흘러간 음원보다, 옆에서 같이 웃긴 소리를 따라 했던 책을 딸은 더 오래 기억했습니다. 양이 아니라 어디에서 반응하는지가 취향의 단서였습니다.

낮은 칸을 비우고 표지를 보이게 꽂았습니다

책장 아래칸을 비웠습니다. 거기에 딸이 좋아할 책만 따로 세웠습니다. 동물이 나오는 책, 마법 장면이 있는 책, 한 페이지만 봐도 웃긴 책. 중고책이나 영어도서관에서 고를 때도 레벨보다 “딸이 이걸 먼저 꺼낼까”를 먼저 봤습니다.

꽂는 방식도 바꿨습니다. 책등만 빽빽하게 보이면 아이는 잘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 권은 표지가 보이게 세워뒀습니다. 표지에 좋아하는 그림이 있으면, 지나가다 손이 먼저 갔습니다.

표지를 보이게 두니 책이 달리 보였습니다. 책등만 줄지어 있을 때는 다 비슷한 숙제처럼 보였는데, 표지가 보이면 그중 한 권이 눈에 띄었습니다.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구경거리에 가까워진 셈입니다. 딸은 눈에 든 그 한 권을 집어서 표지부터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그중에 딸이 유난히 자주 꺼내는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머리가 긴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 누가 봐도 그 아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딸은 아마 그 주인공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책을 며칠씩 다시 꺼내도 질려 하지 않았고, 표지를 들여다보는 얼굴은 남의 이야기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확인하는 얼굴에 가까웠습니다. 취향이라는 게 별게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책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순간, 그 한 권은 숙제도 영어 공부도 넘어서 그냥 자기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러니 굳이 읽으라고 하지 않아도 손이 먼저 갔습니다. 낮은 칸에 그 책이 표지를 보이게 꽂혀 있는 한, 딸은 그 앞을 좀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원에서 내려온 리딩북 옆에 그 취향 책들을 같이 두자, 며칠 뒤 숙제 리딩이 끝나고 딸이 한 권을 더 꺼냈습니다.

“이건 그냥 볼래.”

숙제가 아니라 자기가 고른 책이었습니다. 영어유치원은 방향을 잡아줬지만, 그 방향을 딸 손에 닿게 만든 건 결국 낮은 칸 책장이었습니다. 다만 매번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지친 날에는 숙제만 끝내고 그냥 지나갔고, 꺼내고 안 꺼내고는 딸한테 맡겼습니다. 그렇게 두니 그 한 권까지 숙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책장이며 표지 방향이며 신경을 쓰면서도, 가장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따로 있습니다. 딸이 ‘책’이라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어유치원에서 받은 리딩북이든, 낮은 칸에 꽂아둔 그냥 책이든, 책을 밀어내지 않고 손을 뻗는다는 것. 영어가 빨리 늘었으면 하는 마음에 자꾸 무언가를 더 시키면서도, 정작 제일 고마운 자리는 늘 거기였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그 좋아하는 마음만 지켜줘도 영어는 천천히 그 위에 얹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