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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원에서 받은 구겨진 스티커

    아침에 입고 간 바지가 비닐봉지에 담겨 가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옆에는 갈아입은 여벌옷과, 접힌 별 모양 칭찬표가 같이 있었습니다. 비닐봉지는 아이가 당황했을 시간을, 접힌 칭찬표는 선생님이 그 시간을 조용히 덮어주신 흔적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묻고 싶은 게 먼저 줄을 섰습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친구들이 봤어, 많이 창피했어, 선생님께는 뭐라고 했어. 그런데 아이는 칭찬표보다 제 얼굴을 먼저 봤습니다.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부터 살피는 눈이었습니다. 그 눈빛을 보고 줄 서 있던 질문을 그냥 삼켰습니다.

    영어유치원에서는 화장실 가는 것도 “Can I go to the bathroom?” 같은 문장으로 말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이는 그 문장을 알고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몇 번 해본 말입니다. 그런데 몸이 급한 순간에는 아는 문장도 입 밖으로 안 나옵니다. 그날 일은 영어를 못해서가 아니라, 당황한 순간에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었느냐에 더 가까운 문제였습니다.

    저는 “왜 말 안 했어?”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접힌 칭찬표를 펴 보며 짧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너 도와주셨구나.”

    그 말에 아이가 바로 환해지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칭찬표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졌습니다. 감추고 싶은 일 안에도 누가 도와준 장면이 있었다는 걸 먼저 꺼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다음엔 빈칸을 좀 남겼습니다. 조용히 옆에 앉아 있었고, 일을 크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괜찮아, 말해봐”도 여러 번 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는 말이 반복되면, 아이는 오히려 괜찮지 않은 일이 생겼다고 느낄 것 같았습니다.

    한참 뒤 아이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은 짧았습니다.

    “선생님이 빨리 데려가줬어.”

    저는 더 묻지 않았습니다. 그 한 문장 안에는 아이가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 들어 있었습니다. 실수한 순간보다 선생님이 도와준 순간이 먼저 나온 거였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받아줬습니다. “선생님 고마우셨겠다. 너도 잘 따라가줘서 도와주기 쉬우셨겠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아이 표정이 풀렸습니다.

    며칠 뒤에야 다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실수를 없던 일로 덮자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긴 영어 문장을 다시 연습시키진 않았습니다. 이미 부끄러운 기억 위에 “Can I go to the bathroom?”을 반복시키면, 그 문장까지 싫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짧게만 바꿔줬습니다.

    “Bathroom, please.” “Help, please.” “Teacher, please.”

    급한 순간에 필요한 건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 도움을 부르는 빠른 출구였습니다. 한국말이 먼저 나와도 괜찮다고, 몸이 급하면 영어보다 도움 요청이 먼저라고 말해줬습니다.

    이번 일에서 제가 가장 조심하게 된 건 “영어유치원 다니니까 영어로 말해야지” 하는 급한 마음이었습니다. 문장을 알아도 당황하면 말보다 몸이 먼저 급합니다. 그때 부모가 확인과 훈계부터 앞세우면, 아이는 다음에도 더 늦게 말하게 됩니다. 그날 칭찬표는 상장이라기보다, 아이가 무안할 뻔한 시간을 선생님이 덮어준 작은 완충지에 가까웠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왜 그랬어?”가 아니라 “도움받아도 괜찮아”라는 감각이었습니다. 그 감각이 남아야, 다음번엔 더 빨리 “Bathroom, please”가 나올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