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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랑 같이 영어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친구는 독서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집에 온 뒤, 딸의 영어책은 조금 다른 물건이 됐습니다. 혼자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 됐습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딸 입에서 한 친구 이름이 자주 나왔습니다. 밥 먹다가도 나왔고, 장난감을 만지다가도 나왔습니다. 그냥 같은 반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 집까지 이어지고 싶은 이름처럼 들렸습니다.

    스케줄을 맞춰 그 친구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책 읽히려고 부른 건 아니었습니다. 놀고, 간식 먹고, 다시 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오기 전부터 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장난감보다 책 바구니를 먼저 봤습니다. 평소 읽던 영어책을 아무렇게나 꺼낸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씩 넘겨보더니 따로 빼놓기 시작했습니다.

    웃긴 장면이 있는 책은 앞으로 뺐습니다. 글자가 너무 많은 책은 뒤쪽으로 밀었습니다. 동물이 나오는 책은 따로 두었습니다. 친구가 처음 봐도 따라오기 쉬워 보이는 책을 먼저 골랐습니다.

    저는 그때 조금 놀랐습니다. 평소에는 제가 읽을 책을 골라주거나, 아이가 익숙한 책을 다시 꺼내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기준이 달랐습니다.

    딸은 자기가 읽고 싶은 책만 고른 게 아니었습니다. 친구가 어디에서 웃을지, 어디에서 지루해하지 않을지 먼저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오자 딸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장면부터 펼쳤습니다.

    “여기 봐. 얘 넘어져.”

    친구가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나오자 딸 얼굴이 바뀌었습니다. 책을 잘 읽었다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고른 장면이 친구에게 통했다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책은 숙제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딸은 책장을 넘기며 설명했습니다. 어떤 장면은 건너뛰었고, 어떤 장면은 다시 보여줬습니다. 영어 문장을 전부 읽는 것보다 친구 반응을 더 많이 봤습니다.

    이게 독서 수업이었다면 저는 불안했을 겁니다. 왜 처음부터 안 읽지, 왜 문장을 다 안 읽지, 왜 영어보다 한국말 설명이 많지. 그런 생각이 올라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은 수업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친구가 온 시간이었습니다.

    딸은 책을 읽은 아이처럼 보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에게 웃긴 장면을 소개하는 아이에 가까웠습니다.

    그 차이가 컸습니다.

    책을 많이 읽히려고 하면 부모는 권수부터 봅니다. 오늘 몇 권 읽었는지, 영어 문장을 얼마나 읽었는지, 발음이 어땠는지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친구 앞에서 딸이 한 일은 권수와 달랐습니다. 책을 골랐고, 장면을 골랐고, 보여줄 순서를 골랐습니다.

    혼자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판단이었습니다.

    친구가 “또 보여줘”라고 하자 딸은 같은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평소 같으면 반복 읽기라고 적었을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반복 읽기보다 재상영에 가까웠습니다.

    친구가 웃었던 장면을 다시 찾아서 보여줬습니다.

    그때 저는 독서 동기가 꼭 조용한 책상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책을 혼자 읽는 시간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질문을 조금 바꿨습니다.

    “이 책 읽을래?”보다

    “이 책은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어?”

    “이 장면은 누가 웃을 것 같아?”

    “친구가 오면 어느 페이지부터 보여줄래?”

    이런 질문이 더 오래 갔습니다.

    딸은 대답하면서 책을 다시 넘겼습니다. 어떤 책은 친구용이라고 했고, 어떤 책은 자기 혼자 보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책에도 자기 기준이 생긴 겁니다.

    저는 그날 친구를 독서 도구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친구가 왔으니 영어책 읽자, 둘이 같이 읽어봐, 서로 발표해봐. 이런 식으로 몰고 가면 관계가 바로 수업이 됩니다.

    그건 피하고 싶었습니다.

    친구는 친구여야 했습니다. 책은 그 사이에 잠깐 들어온 물건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래도 변화는 생겼습니다. 친구가 다녀간 뒤 며칠 동안 딸은 책을 고를 때 가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친구가 좋아할 것 같아.”

    그 말이 나오면 책 선택이 달라졌습니다. 쉬운 책을 고르는 이유도 달라졌고, 웃긴 장면을 다시 보는 이유도 달라졌습니다.

    쉬워서 도망가는 책이 아니라, 친구에게 보여주기 좋은 책이 된 겁니다.

    영어책을 혼자 읽는 일도 중요합니다. 리딩 레벨도 필요하고, 꾸준히 읽는 습관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곱 살 아이에게 책은 가끔 관계 안에서 더 빨리 살아납니다.

    친구가 웃어준 장면 하나가 다음 책을 고르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결론을 독서법으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확인한 건 거창한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친구가 다녀간 뒤에 달라진 건 책 권수가 아니었습니다. 딸은 책을 고를 때 친구 얼굴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이 책은 친구가 웃을 것 같은지, 이 장면은 보여주기 쉬운지, 글자가 너무 많지는 않은지 혼자 따져봤습니다.

    그 뒤로 쉬운 책을 다시 꺼내는 이유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익숙해서 꺼낸 책처럼 보였는데, 그날 이후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좋은 책으로 다시 꺼내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 오면 저는 책을 많이 꺼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 몇 권이면 충분합니다. 순서도 제가 정하지 않고 아이가 정하게 둘 겁니다.

    오늘 기록은 여기서 끝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