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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실 앞 수건

    수건은 원래 머리 말리려고 꺼낸 거였습니다. 영어를 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었고, 책 옆에 둔 교구도 아니었습니다. 씻고 나온 딸 머리에서 물기가 떨어져서 그냥 수건 하나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딸은 머리를 닦지 않았습니다. 수건 끝을 잡고 거실 바닥에 앉더니 손목으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이었습니다. 소파 앞 러그 위에서 수건이 작게 돌았고, 딸은 그 움직임을 보면서 몸을 옆으로 기울였습니다.

    저는 그때도 영어를 붙이고 싶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round”를 말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고 있으니까 round, 다시 돌리니까 again, 멈추니까 stop. 머릿속에서는 이미 영어 표현 몇 개가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그날은 단어를 먼저 꺼내면 놀이가 깨질 것 같았습니다. 딸은 수건이 도는 모양을 보고 있었고, 저는 그걸 영어 문장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놀고 있는데 아빠 혼자 수업 준비를 하고 있던 셈입니다.

    수건은 오래 돌지 못했습니다. 한쪽 끝이 바닥에 걸리면서 툭 멈췄습니다. 딸은 다시 손목을 틀었습니다. 수건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접혔고, 동그랗게 돌기보다 길게 끌렸습니다.

    저는 그제야 짧게 말했습니다.

    “Round.”

    딸은 바로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수건을 다시 돌렸습니다. 영어를 못 들은 게 아니라, 지금은 수건이 먼저였던 겁니다.

    예전 같았으면 저는 그 순간 한 번 더 시켰을 겁니다. 따라 해봐. Round. 다시 말해봐. 이렇게. 그러면 아이는 수건을 멈추고 제 입을 봤을 겁니다. 놀이가 멈추고 발음 확인만 남았을 겁니다.

    그날은 수건을 계속 돌리게 뒀습니다.

    딸은 손목을 크게 쓰다가 점점 작게 줄였습니다. 팔 전체로 돌릴 때는 수건이 바닥을 치고, 손목만 살짝 움직이면 수건 끝이 원처럼 따라왔습니다. 저는 그 차이를 보면서 아이가 이미 몸으로 순서를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그다음에는 작게. 멈추면 다시. 수건이 꼬이면 풀고, 멀리 가면 끌어오고, 소파 밑으로 들어가면 엎드려 꺼냈습니다.

    영어 순서는 종이에 적힌 게 아니라 거실 바닥에서 생겼습니다.

    저는 중간중간 아주 짧은 말만 붙였습니다. “Again.” “Stop.” “Slow.”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딸이 따라 하면 좋고, 안 따라 해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날의 중심은 단어가 아니라 움직임이었습니다.

    한 번은 수건이 제 발 앞에서 멈췄습니다. 딸은 손으로 저를 가리켰습니다. 이번에는 아빠 차례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수건 끝을 잡고 어설프게 돌렸습니다. 생각보다 잘 안 됐습니다. 손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니 수건이 둥글게 돌지 않고 바닥에 철썩 붙었습니다.

    딸이 웃었습니다.

    그 웃음 뒤에 영어가 붙었습니다. 제가 붙인 게 아니라, 상황이 붙인 말이었습니다. 다시 해보라는 눈빛이 먼저 왔고, 저는 “Again?” 하고 물었습니다. 딸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부터 수건은 단어장이 아니었습니다. 차례를 넘기는 물건이 됐습니다. 딸이 돌리고, 제가 돌리고, 다시 딸이 가져갔습니다. 성공하면 웃고, 실패하면 더 크게 웃었습니다. 영어는 그 사이에 아주 조금씩 끼어들었습니다.

    많이 말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오히려 적게 말할수록 놀이가 길어졌습니다. 제가 문장을 길게 만들면 딸은 멈췄고, 제가 짧게 붙이면 다시 움직였습니다. 그 차이가 눈에 보였습니다.

    수건 하나로 영어를 가르쳤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날 딸이 외운 단어가 몇 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어가 들어갈 틈은 있었습니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웃음이 나오고, 차례가 오가고, 그 사이에 짧은 말이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봤습니다. 하루 종일 유치원에서 영어를 하고 온 아이에게 집에서 또 긴 문장을 요구하는 것보다, 거실 바닥에서 수건을 한 번 더 돌리는 쪽이 나을 때도 있었습니다.

    수건은 결국 소파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딸은 엎드려 팔을 뻗었고, 손끝으로 수건을 끌어냈습니다. 먼지가 조금 묻은 수건을 털더니 제 앞에 다시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손목을 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