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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에서 본인의 가방을 가지고 기다리는 딸

     

    호주 공항에서 아이가 제 뒤가 아니라 직원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짐 하나와 커피를 들고 있었고, 아이는 자기 작은 가방을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저를 보지 않고 직원 쪽을 봤습니다. 짐이 괜찮은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잠깐 쉴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고 싶은 얼굴이었습니다.

    영어 문장이 완벽해서 놀란 건 아니었습니다. 문법이 정확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낯선 공항에서 자기 하루를 확인하려는 방향이 제 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향한 게 먼저 보였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잠깐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가 언젠가 해외에서 공부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설렘 뒤에 바로 다른 장면들이 따라왔습니다. 짐을 잃어버렸을 때, 배가 아플 때, 친구 말이 너무 빠를 때, 밤에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설명할 사람이 없을 때. 조기유학은 영어를 잘하는 아이를 보내는 일이 아니라, 낯선 하루를 혼자 조금씩 견디는 문제처럼 보였습니다.

    공항에서는 씩씩했다

    아이의 첫 질문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짐이 괜찮은지 확인하는 말이었습니다. 어른에게는 별것 아닌 확인입니다. 하지만 7살 아이에게는 자기 물건과 불안을 같이 들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조기유학을 생각하면 학교 이름, 지역, 영어 실력, 수업 적응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친구들과 말할 수 있을까. 숙제는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공항에서는 훨씬 작고 현실적인 장면이 먼저 나왔습니다. 내 가방은 괜찮은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이게 안 되면 영어 단어를 많이 알아도 하루가 금방 무너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준비물을 잃어버렸을 때, 급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몸이 불편할 때, 아이가 자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영어유치원에서 했던 숙제, 영어책 읽기, 발표 연습이 공항에서 짧은 질문으로 나온 건 분명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 하나로 조기유학을 쉽게 상상하기에는, 공항은 너무 낯설고 컸습니다. 아이가 제 뒤에 숨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그 아이가 언젠가 정말 혼자 서야 할 장면까지 같이 떠올랐습니다.

    공부할 곳보다 쉴 곳

    아이는 라운지가 어디인지도 궁금해했습니다. 아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도 찾으려 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공부할 곳보다 쉴 곳을 먼저 찾는 아이. 그게 나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해외 학교생활도 비슷할 것 같았습니다. 좋은 교실이 있고, 좋은 선생님이 있고, 좋은 커리큘럼이 있어도 아이가 하루 중 어디에서 숨을 고를 수 있는지 모르면 금방 지칠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에 어디에 앉는지, 점심시간에 누구 옆에 서는지, 속상할 때 어느 어른에게 가는지, 방과 후에 말이 안 나오는 시간을 어떻게 넘기는지. 이런 것들은 유학원 브로슈어에는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많은 지역이 좋을지, 영어만 쓰는 환경이 좋을지 같은 고민도 그때 다르게 보였습니다. 한국인이 많으면 마음은 덜 외로울 수 있습니다. 대신 영어를 꼭 써야 하는 순간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은 영어 환경에는 좋을 수 있습니다. 대신 아이가 마음을 둘 자리를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호주 공항에서 아이가 찾은 건 영어 환경이 아니라, 자기 몸을 잠깐 내려놓을 자리였습니다.

    밤에는 다른 문제가 된다

    낮에는 아이가 씩씩해 보일 수 있습니다. 공항에서도 그랬습니다. 사람도 많고, 안내 방송도 나오고, 직원도 있고, 주변이 계속 움직입니다. 아이는 그 흐름 속에서 잠깐씩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조기유학을 생각하면 저는 자꾸 밤이 떠올랐습니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웃고, 선생님 앞에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부모와 떨어진 방에서 혼자 잠들어야 할 때, 속상한 일을 설명하지 못하고 이불을 덮어야 할 때, 전화기 너머로 괜찮다고 말해야 할 때. 그 시간은 영어 성적표에 나오지 않습니다.

    공항에서 짐을 확인하던 아이가 밤에도 자기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까. 쉴 곳을 찾던 아이가 학교 안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직원에게 짧게 물었던 아이가 아픈 날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보딩스쿨이라는 말은 부모에게 안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하루 종일 학교 안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낮의 영어와 밤의 마음은 다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인정해야 했습니다. 공항에서 씩씩하게 직원 쪽으로 몸을 돌린 아이를 보며 제 마음 한구석이 부풀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내 아이가 이만큼 해냈다는 걸 은근히 확인받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습니다. 조기유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럴듯함, 글로벌이라는 말이 주는 묘한 허영심도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유학 지도를 펼치는 건 기회가 아니라 부담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힘, 몸이 힘들 때 도움을 청하는 힘, 마음이 무너지는 밤에 버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힘. 이게 아직 충분히 보이지 않는데 학교 이름부터 고르는 건 순서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브로슈어를 덮은 뒤

    한국에 돌아와 거실 책상 위에 유학원 브로슈어를 올려두었습니다. 푸른 잔디밭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외국 아이들 사진이 있었습니다. 기숙사 사진도 있었고, 방과 후 프로그램도 있었고, 진학 결과도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런 페이지를 오래 봤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진 위로 호주 공항 직원의 명찰을 빤히 보던 아이의 뒤통수가 겹쳐 보였습니다. 비싼 학비와 커리큘럼이 빽빽하게 적힌 페이지를 넘기다가, 저는 그냥 책을 덮었습니다. 조기유학이 나쁜 선택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금 제 눈에 먼저 들어와야 할 것은 학교 사진이 아니라 아이가 낯선 하루를 어떻게 견디는지였습니다.

    브로슈어는 서랍 맨 아래쪽에 넣었습니다. 철 지난 앨범 밑으로 밀어 넣고 서랍을 닫으려는데, 방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 내 가방 어디 있어?”

    저는 서랍을 끝까지 닫지 못하고 잠깐 멈췄습니다. 아직은 가방끈을 대신 찾아줄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아직은 밤에 울면 바로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아직은 아이가 영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표정만 보고 물을 따라줄 수 있는 거실이었습니다.

    서랍을 닫고 아이 가방을 찾으러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