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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을 마친 아이가 차 안에서 물병을 찾고 말없이 쉼

    수업을 마치고 나온 딸이 차에 탔다.

    다음 수업 가방을 찾은 것도 아니고 책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물병부터 찾았다.

    몇 모금 마시고는 뒷좌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는 바로 수업 이야기를 물었을 것이다.

    오늘 어땠는지, 다음 일정은 괜찮은지, 뭘 배웠는지.

    그런데 그날은 백미러로 딸을 한번 보고 그냥 운전했다.

    정확히 왜 조용했는지는 모른다.

    피곤했을 수도 있고, 목이 많이 말랐을 수도 있고, 그냥 아무 말도 하기 싫었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는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짠 시간표에는 영어, 독서, 사고력, 운동 같은 수업 이름은 빼곡하게 있었는데 그 수업과 수업 사이에 있는 딸의 시간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시간표에는 수업 이름만 있었다

    나는 그동안 이동시간을 그냥 이동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몇 분이 걸리는지, 차가 막히는지, 다음 수업에 늦지 않는지가 중요했다.

    시간이 조금 남으면 아깝다는 생각도 했다.

    차 안에서 책이라도 보면 좋겠고, 영어 오디오라도 들으면 시간을 잘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수업을 끝내고 물병을 들고 가만히 앉아 있는 딸을 보면서 처음으로 반대로 생각했다.

    이 시간에 왜 또 뭔가를 넣으려고 했을까.

    유치원에서 나와 다음 수업으로 가는 시간, 한 학원에서 나와 다른 일정으로 이동하는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내 시간표에서는 전부 빈칸이었다.

    하지만 실제 딸 하루에서는 빈칸이 아니었다.

    앞 수업은 이미 끝났고 다음 수업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그 중간을 아무것도 아닌 시간처럼 보고 있었다.

    좋은 수업을 고르는 것만 생각했다

    사교육 일정을 짤 때 내가 주로 본 것은 수업이었다.

    이 수업이 필요한지, 선생님은 어떤지,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지, 시간은 맞는지.

    각각 하나씩 보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를 더 넣는 것은 쉬웠다.

    문제는 그렇게 넣은 수업들이 하루 안에서는 서로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영어 하나만 보면 영어 수업이고, 운동 하나만 보면 운동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는 앞 일정이 끝나자마자 차를 타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하루였다.

    나는 수업 하나하나는 꽤 열심히 골랐는데, 정작 그 수업 사이를 어떻게 보낼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딸이 물을 마시며 조용히 있는 모습을 보고 내가 다시 본 것은 학원 자체가 아니었다.

    수업 사이 간격이었다.

    수업을 줄여야 한다는 결론을 바로 내린 것도 아니다.

    영어도 필요했고, 독서도 했고, 운동도 계속했다.

    대신 이제는 다음 수업을 잡을 때 그 사이 시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 빈칸도 시간표로 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일정 사이가 비어 있으면 뭔가 하나 더 할 수 있는 시간처럼 보였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본다.

    앞 수업을 끝내고 나온 딸이 차에 타는 시간도 하루 일정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아이가 책을 보면 책을 보는 것이고, 말을 하면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두는 날도 생겼다.

    중요한 것은 차 안을 또 하나의 작은 수업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이 변화가 생겼다고 우리 집 사교육이 갑자기 단순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바쁜 날도 있고 일정이 붙는 날도 있다.

    나도 늘 잘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시간표를 보는 눈은 하나 달라졌다.

    예전에는 수업과 수업 사이에 빈칸이 보이면 무엇을 더 넣을 수 있는지 먼저 생각했다.

    이제는 그 빈칸이 정말 비어 있어도 되는지부터 본다.

    그 생각을 하게 만든 건 교육 책도 아니고 전문가 이야기도 아니었다.

    학원을 마치고 차에 탄 딸이 가방보다 먼저 찾았던 물병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아이 시간표에서 수업 이름만 세지 않는다.

    그 사이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같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