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현관 앞에 택배상자 세 개가 쌓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씻기 전이었고, 저는 박스를 접어야 했습니다. 영어를 하려고 만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박스가 많았습니다.아이 손에는 얇은 영어 그림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제가 읽자고 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낮에 읽다 만 탈것 그림책이었고, 아이가 종이가방 안에 넣어 들고 나왔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습니다. 그 순간 “그럼 내려가서 한 번 읽어볼까?”라고 말하면 바로 숙제가 될 것 같았습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는 거울을 봤습니다. 책은 종이가방 안에 반쯤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박스를 발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영어는 한마디도 안 나왔습니다.책을 펼치기 전에 나온 말지하 1층 분리수거장 앞에서 박스를 접는데..
빨래바구니를 바닥에 엎어놓고 딸과 양말을 나누던 평범한 저녁이었습니다. 책도, 패드도, "이거 영어로 뭐게?" 같은 퀴즈도 없었어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짝을 맞추는 중이었습니다. 딸이 분홍 양말 한 짝을 들고 짝을 찾다가, 옆에 파란 줄무늬 양말을 놓더니 작게 물었습니다. "Different sock?" 색이 다르니 아이 눈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한국말 '다른'이 영어에선 한 단어로 안 끝난다는 게 새삼 보였습니다.그때 우리가 하던 일은 색을 고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짝을 맞추는 일이었죠. 그래서 분홍 양말의 진짜 짝을 찾아 옆에 놓고 짧게 말해줬어요. "This is the other sock." 딸은 두 짝을 나란히 두고 보더니, 같은 색에 같은 무늬인 걸 확인하고..
나는 그날 아이 영어를 읽은 게 아니라 채점하고 있었다.영어유치원 가방에서 접힌 프린트 한 장이 나왔습니다. 숙제장인 줄 알았는데 얇은 영어 기사였습니다. 글자는 꽤 많았고, 사진은 한쪽에 작게 들어가 있었습니다.제가 먼저 본 것은 글자였습니다.단어를 아는지, 문장을 읽을 수 있는지, 내용을 이해했는지, 이 정도 기사면 지금 아이 수준에 맞는지.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딸은 달랐습니다.글자를 먼저 훑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봤습니다. 사진 속에는 길 위에 남은 흔적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발자국 같기도 했고, 지나간 자국 같기도 했습니다.딸은 손가락으로 사진 한쪽을 짚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습니다.그리고 말했습니다.“Maybe it is lost.”그 말을 듣고도 저는 바로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AI보다 먼저 나온 아이의 안내 방송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집에 노란 우산 하나가 현관에 세워져 있었고, 딸은 그걸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우산을 펴지도 않았습니다. 손잡이만 잡고 서 있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바꿨습니다.“This way, please.”처음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숙제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영어책을 펼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안내원처럼 말한 겁니다.저는 그 순간 AI 앱을 켤까 말까 잠깐 고민했습니다. 요즘은 역할놀이 문장도 바로 뽑아주고, 아이 수준에 맞게 대화도 이어줍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바로 켜고 싶지 않았습니다.이미 아이가 먼저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제가 먼저 AI에게 “영어 역할놀이 문장 만들어줘”라고 시킨 게 아니라, 아이가..
수건은 원래 머리 말리려고 꺼낸 거였습니다. 영어를 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었고, 책 옆에 둔 교구도 아니었습니다. 씻고 나온 딸 머리에서 물기가 떨어져서 그냥 수건 하나를 건넸습니다.그런데 딸은 머리를 닦지 않았습니다. 수건 끝을 잡고 거실 바닥에 앉더니 손목으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이었습니다. 소파 앞 러그 위에서 수건이 작게 돌았고, 딸은 그 움직임을 보면서 몸을 옆으로 기울였습니다.저는 그때도 영어를 붙이고 싶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round”를 말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고 있으니까 round, 다시 돌리니까 again, 멈추니까 stop. 머릿속에서는 이미 영어 표현 몇 개가 줄을 섰습니다.그런데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다.이상하게 그날은 단어를 먼저 꺼내면 놀이가..
식탁 위 저울은 0g에서 멈춰 있었습니다. 작은 그릇 하나가 올라가 있었고, 딸은 숟가락을 들고도 한참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스 병을 보고, 숫자를 보고, 다시 제 얼굴을 봤습니다.그날 저는 영어를 시키려고 저울을 꺼낸 게 아니었습니다. 저녁 반찬 옆에 소스를 조금 덜어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숫자가 바뀌는 걸 오래 보고 있었습니다. 숟가락 끝에 소스가 매달려 있었고, 저는 그 장면에 영어를 붙이고 싶어졌습니다.more, little, stop.머릿속에서는 이미 짧은 단어들이 줄을 섰습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바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0g 앞에서 말이 멈춘 시간딸은 소스를 뜨기 전에 한참을 멈췄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있었지만 손목이 움직이지 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