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딸이 영어로 혼잣말을 했다. 화가 난 채로. 내용은 못 알아들었다. 무슨 영상에서 본 표현인지 모르겠는데, 누가 봐도 화내면서 중얼거리는 영어였다. 아내가 오랜만에 비행을 마치고 부산에 와 있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나도 더웠고 회사에서 실적으로 한소리 들었고, 딸은 딸대로 숙제와 시험 때문에 혼이 났다. 집 안에 쏴한 기운이 돌았고, 우리 셋은 각자 화가 나 있었다. 아이라고 매일 행복하고 기분 좋게만 보내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날이 아니었다.화난 날, 짜증도 영어로혼잣말은 방 쪽에서 들려왔다. 중얼중얼 이어지는데 한국어가 하나도 안 섞여 있었다. 내가 아내를 쳐다봤다. 어쭈, 이제 짜증도 영어로 내냐. 속으로 그 말이 먼저 나왔다.아내가 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딸 잘못한 걸 바로잡아 주..
나는 분명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산 해운대 엘시티 워터파크 신발장 앞에서 중국인 관광객과 마주치자 말이 막혔다. 휴대전화로 AI와 구글 번역기까지 켰지만 서로 당황하고 예민해진 상황에서는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설명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꾸 엉켰다. 그때 엄마와 함께 나를 찾으러 온 일곱 살 딸이 웃으며 우리 사이로 들어왔다.AI도 번역기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 신발장 앞우리 가족이 워터파크에 간 것은 거의 4년 만이었다. 그때 딸은 물에 둥둥 띄워 놓을 정도로 어린 아기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비행 일정으로 늘 바쁜 와이프가 모처럼 시간을 냈고, 나도 회사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 주말이었다. 아이 역시 공부와 학원으로 바쁘게..
영어 패드 숙제를 할 때면 저는 딸 옆에 앉습니다. 본문을 읽고 객관식 세 문제를 푸는 숙제인데, 화면을 잘못 누르면 점수에 바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아이가 문제를 제대로 읽는지, 답을 고르기 전에 엉뚱한 곳을 누르지는 않는지 화면을 유심히 봅니다.그런데 이날 딸의 영어 숙제를 멈춘 것은 패드 안의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화면 옆에 있던 간식을 허락도 받지 않고 집어 든 제 손이었습니다.지우개와 연필 아래 있던 고구마쫀득이패드 옆에는 딸이 편의점에서 직접 고른 고구마쫀득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보면 추억의 불량식품이라고 부를 만한 간식이었습니다.딸은 한꺼번에 먹지 않고 아껴 먹고 있었습니다. 간식 위에는 지우개와 연필이 올려져 있었습니다.저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딸아이가 영어로 무언가를 설명할 때면 저는 종종 휴대전화를 듭니다.아이의 말을 남겨두고 싶기도 하고, 비행 일정으로 집을 비운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합니다.평소 아이는 카메라를 손으로 가리며 말하곤 했습니다.“찍지 마.”그런데 영어학원과 수학학원, 영어 라이팅 학원이 한 주 동안 함께 쉬던 이번 방학에는 같은 아이에게 전혀 다른 말을 들었습니다.“나 잘하지?”오전 화교학교 특강과 중국어 숙제, 영어 패드 숙제는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영어 교재가 갑자기 쉬워진 것도 아니었습니다.다만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이어지던 학원 일정이 쉬었고, 제가 아이에게 영어를 묻는 시점도 달라졌습니다.며칠 만에 영어 실력이 크게 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대신 그 장면은 제가 아이의 영어를 판단하던 시간에 질문 하나를 남..
“다른 데서 배우지 마. 내가 알려줄게.”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약 20일 된 일곱 살 딸이 내게 한 말이다.내가 다른 곳에서 중국어를 배워 딸보다 더 잘하겠다고 장난치자 아이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 완전히 삐졌다.결국 나는 약속했다.“알겠어. 아빠는 다른 데서 안 배우고 딸한테 배울게. 대신 진짜 교장선생님만큼 잘 알려줄 수 있어?”딸은 자신 있게 알겠다고 했다.그 약속이 생기기 전, 딸은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아빠에게 물고기 가족을 가르치고 있었다.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한국어로 뜻을 풀었고, 그래도 모르는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영어까지 꺼냈다.영어를 가르쳐왔다고 생각했던 아빠가 중국어에서는 딸의 학생이 된 날이었다.중국어를 보여주기 전에 누가 볼지 먼저 물었다2026년 7월, 딸은 화교학교 정식..
영어학원에서 보내준 결과 화면을 열었다. 등급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C가 있었고 어떤 답변에는 F가 찍혀 있었다.7월부터 다니기 시작한 학원에는 패드로 AI와 대화하는 수업이 있다. AI가 영어로 질문을 하면 아이가 답을 녹음하고, 그 답변을 분석해 등급을 매긴다.처음에는 AI가 일곱 살 아이의 발음을 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우리 딸은 영어를 꽤 편하게 말하기 때문이다.말은 많이 했는데 등급은 내려갔다녹음을 들어보니 아이는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고 한두 단어로 끝내지도 않았다. 자기가 알아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꽤 긴 이야기를 했다. 옆에서 듣고만 있으면 잘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답변이었다.그런데 질문과 답을 나란히 놓고 들어보니 사정이 달랐다. 아이는 영어가 막혀서 헤맨 게 아니었다. 질문이 무엇을 묻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