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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집이라면 단어시험을 한 번쯤 겪습니다. 아이가 100점을 받아 오면 안심이 되고, 몇 개 틀려 오면 마음이 쓰입니다. 그런데 몇 해 지내며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시험을 다 맞았다고 그 단어를 제대로 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그날 그 목록을 기억했는지 확인하는 도구입니다. 다 맞혀도 며칠 뒤 다시 물으면 흐릿해지는 단어가 있고, 틀렸어도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면 또렷해지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점수 자체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대신 단어를 다루는 방식을 몇 가지로 정해 두었습니다.

    첫째, 아침에는 힘을 뺍니다. 등원 전에 단어를 확인하긴 하지만 다 맞히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아침밥을 먹이면서 단어 스무 개를 100% 다 시키면 아이가 체합니다. 표정이 굳고, 하루를 닫힌 얼굴로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 아이는 표정에서 바로 티가 납니다. 아는 단어가 나오면 기분 좋게 맞히고 하루를 산뜻하게 엽니다. 그 얼굴을 보면 아침에 굳이 더 밀어붙일 이유가 없습니다. 어른도 웃으며 집을 나선 날과 울상으로 나선 날은 하루가 다릅니다. 출근길 기분이 그날 일에 묻어나듯, 아이의 아침도 그렇다고 봅니다. 전날 늦게까지 공부하고 잔 아이가 아침마저 단어시험 스트레스로 시작한다면, 하루가 시작도 전에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편하게 보라고 합니다. 틀려도 괜찮다고 말해 줍니다. 다 맞히는 것보다 아이가 덜 굳은 얼굴로 등원하는 편이 더 낫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틀린 단어는 그 자리에서 붙잡지 않고 따로 모읍니다. 아침에 틀린 단어, 유치원에서 틀려 온 단어를 종이와 파일에 따로 적어 둡니다. 일종의 오답노트인 셈입니다. 그 순간에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틀린 단어를 붙잡고 늘어지면 아이도 저도 지칩니다. 일단 적어 두고 넘어갑니다.

    아침에 길게 설명하지 못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영어유치원에서 배우는 단어가 매일 쉬운 것만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수준이 올라가서, 이게 유치원에서 배우는 단어가 맞나 싶은 고급 단어도 섞여 나옵니다. 한번은 element, 그러니까 ‘요소’라는 단어를 아이에게 설명해 주려다 저부터 잠깐 막혔습니다. 요소를 일곱 살이 이해하도록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 바로 떠오르지 않더군요. 시간이 넉넉하면 예도 들고 영상도 보여 줄 텐데, 등원 전 아침에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정확히 알려 주고 싶은 마음과 시간이 부딪히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단어일수록 무리해서 그 자리에서 끝내려 하지 않고, 오답노트로 넘겨 둡니다.

    셋째, 모인 단어는 주기를 정하지 않고 몰아서 다시 봅니다. 매일 복습하지 않습니다. 오답이 어느 정도 쌓이면 그때 날을 잡아 다시 알려 줍니다. 정해진 요일이나 간격은 없습니다. 양이 모이고 아이 컨디션이 받쳐 주는 날, 한 번에 훑습니다. 매일 조금씩 하는 부담보다, 가끔 몰아서 정리하는 편이 우리 집에는 맞았습니다.

    이 방식을 택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완벽을 좇으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100점을 기준으로 잡는 순간 아침마다 쫓기고, 작은 실수에도 목소리가 올라갑니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영어를 부담으로 느끼고, 저도 매일 채점하는 사람이 됩니다. 완벽을 밀어붙이다 둘 다 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어를 느슨하게 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틀린 단어를 그냥 흘려보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따로 모아 두면 반드시 한 번은 다시 돌아옵니다. 달라지는 건 단어를 언제 어떤 온도로 다시 보느냐입니다.

    단어는 한 번 외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마주치며 천천히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한 번의 시험 점수보다, 틀린 단어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오는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답노트는 그 구조를 만드는 장치입니다. 틀려도 괜찮은 이유는, 틀린 단어가 그냥 흘러가지 않고 어딘가에 모여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다시 만남이 꼭 책상 위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공부하다가, 혹은 그냥 생활하다가 어제 아침에 틀린 단어나 저녁에 다룬 주제를 우연히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다가, 길을 걷다가 ‘어, 저거 그거네’ 하고 아이가 먼저 알아보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복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 셈입니다. 오답노트가 부모가 의도해서 만든 복습이라면, 이런 순간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따라오는 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활 속에서 다시 만난 단어가 의외로 오래 남습니다.

    정리하면 우리 집 단어 원칙은 세 가지입니다. 아침에는 힘을 빼고, 틀린 단어는 따로 모으고, 모이면 몰아서 다시 본다. 어떤 날은 아침 시험 준비가 잘되어 좋고, 안 그런 날도 제법 많습니다. 그래도 틀리든 맞든 아침에 영어를 한 번 접하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 저는 지금은 그걸로 만족합니다.

    지금 욕심을 내지 않는 건 다음을 포기해서가 아닙니다. 이 정도가 몸에 익으면, 그때 단어 수든 난이도든 조금씩 올리면 된다고 봅니다. 지금은 100점보다 그 순서를 지키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