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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이 영어 그림책을 펼쳐놓고 집에 있던 작은 동물 인형을 가져왔다.

    인형을 책 위에 올려놓더니 그림 속 동물이 왜 숨어 있는지 자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딸의 설명은 한국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영어 쪽으로 생각이 움직였다.

    영어책을 보고 있으니 지금 만든 이야기도 영어로 한번 말하게 해볼까 싶었다.

    아빠표 영어를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순간이 자주 생긴다.

    아이가 뭔가를 말하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연결하고 싶고, 영어책을 펼치면 영어 한 문장이라도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따라온다.

    그날도 그랬다.

    그런데 딸은 이미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어로 바꿔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영어책이면 영어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어책을 읽는 시간을 꽤 단순하게 볼 때가 있었다.

    영어 문장을 읽고, 뜻을 알고, 영어로 반응하면 잘 읽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반대로 영어책을 보면서 한국말이 나오면 영어에서 잠깐 벗어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날 딸을 보면서 그 기준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책을 덮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영어책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림 속 상황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했고, 집에 있던 인형까지 가져와 장면을 바꿔보고 있었다.

    말만 한국어였을 뿐 책에서 완전히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아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듣기도 전에 그 반응을 다시 영어로 바꾸려고 했다.

    딸은 번역을 한 게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날 딸이 한 말은 책 문장을 한국말로 옮기는 설명이 아니었다.

    그림 속 동물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자기 이유를 붙이고 있었다.

    책에 적힌 답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자기가 본 장면에 이야기를 하나 더 얹고 있었다.

    나는 그걸 듣다가 영어 한 문장을 끼워 넣으려던 마음을 접었다.

    영어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멈출 이유가 없어 보였다.

    딸에게는 이미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나는 자꾸 그 이야기가 영어공부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날은 그냥 들었다.

    인형이 책 위에서 움직이고, 딸이 그 장면을 자기 말로 바꾸는 걸 봤다.

    내가 바꾼 건 아이의 말이 아니라 보는 기준이었다

    이 한 번의 경험으로 영어책을 읽을 때 한국말을 쓰는 것이 더 좋다고 결론 내리고 싶지는 않다.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날도 있고, 아이가 먼저 영어 표현을 꺼내는 날도 있다.

    다만 나는 영어책을 보고 나온 반응을 영어 문장 개수만으로 보지 않게 됐다.

    아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뿐 아니라, 책에서 무엇을 가져와 자기 방식으로 바꾸고 있는지도 같이 보려고 한다.

    한국말이 먼저 나왔다고 해서 바로 영어로 다시 말하게 하지 않는다.

    먼저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들어본다.

    그날 딸은 영어책을 보면서 영어 문장을 새로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책 속 한 장면을 자기 이야기로 바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다시 영어 숙제로 돌려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