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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표 영어교육

딸은 그게 프랑스어인 줄 모른다

아빠표 유아영어 기록 2026. 8. 16. 10:12

목차


    사범님이 알레, 하면 딸이 몸을 먼저 움직인다. 뜨슈, 마르쉐, 팡트도 마찬가지다. 그 소리가 나면 생각하기 전에 자세가 잡힌다. 나는 그걸 옆에서 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우리 딸이 영어를 배운 방식이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뜻을 먼저 배우고 쓴 게 아니라, 상황에 맞는 소리를 계속 듣다가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된 것. 딸은 그게 프랑스어라는 것도 모른다. 7월부터 펜싱을 시작했는데 한 달이 좀 넘었다. 그 사이에 딸한테 생긴 변화가 하필 영어 쪽이라는 게 나는 좀 신기했다.

    펜싱 용어, 뜻 몰라도 몸이 먼저 움직인다

    7살 딸이 펜싱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상대와 마주 선 채로 앙가르드 자세를 잡고있다

    펜싱에서 많이 하는 자세가 마르쉐와 팡트다. 시합 중에는 알레와 뜨슈 같은 말이 계속 나온다.

    나는 그 말뜻을 딸한테 알려주지 않았다. 일부러 안 알려준 것도 아니고 그냥 알려줄 일이 없었다. 딸은 그 단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글자로 본 적이 없으니까. 그저 사범님이 상황에 맞는 소리를 내면 거기 맞춰 자세를 잡고 움직인다.

    더 재밌는 건 딸이 그게 무슨 언어인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냥 펜싱할 때 쓰는 말, 게임에서 나오는 구호 정도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도 어려워하지 않는다. 어렵다고 느끼려면 그게 외국어라는 걸 먼저 알아야 하는데, 딸은 그 단계를 통째로 건너뛰었다.

    나는 이 지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우리 딸이 영어를 익힐 때도 이랬거든. 다섯 살에 영어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단어 뜻을 외워서 시작한 게 아니었다. 선생님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를 계속 듣다가, 어느 순간 그 소리가 나오면 몸이 먼저 알아들었다. 뜻은 나중에 붙었다.

    펜싱장에서 딸을 보면 그때가 다시 재생되는 느낌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그걸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다는 것 정도다.

    솔직히 나도 그 말들의 정확한 뜻은 모른다. 나도 작년에 일 년 넘게 펜싱을 다녔는데, 그동안 알레가 무슨 뜻인지 찾아본 적이 없다. 그 소리가 나면 시작이라는 것만 알면 됐으니까. 그러니까 그 펜싱장 안에서는 어른이나 일곱 살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그 말을 쓰고 있는 셈이다.

    아리가또·마르쉐, 7살이 스스로 건진 말들

    펜싱을 시키게 된 건 아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다. 제대로 된 운동을 하나 시켜보자는 마음이었고, 나도 딸도 동의해서 셋이 같이 정했다. 대신 그동안 다니던 줄넘기와 키즈요가는 끊었다.

    사실 밑밥은 내가 깔아뒀다. 작년에 내가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펜싱을 다녔거든. 다녀올 때마다 땀범벅이 돼서 집에 왔고, 집에서 딸한테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딸은 내가 펜싱하는 모습을 몇 번 직접 보기도 했다.

    펜싱클럽은 7월부터 매주 토요일에 다닌다. 그런데 여기가 좀 특이하다. 외국인도 제법 오고 청소년들도 오는데 거의 국제학교 다니는 아이들이다. 수업을 같이 받고 마지막 20분 정도는 시합을 한다. 역시 운동은 어릴 때 배워야 하나 보다. 내가 이기기에는 참 역부족이었다.

    그것보다 놀란 건 그 아이들이 수업 내내 영어로 대화한다는 점이었다. 그게 편한가 보다. 옆에서 듣고 있으면 미드를 보는 느낌이었다.

    우리 딸이 낯을 정말 많이 가린다. 첫 주에는 그냥 미소로만 대화했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못 했다. 둘째 주에는 땀 흘리면서 언니 오빠들 영어 대화를 계속 듣기만 했다. 그러다 셋째 주부터 조금씩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주도적으로 나선 건 아니었다. 언니 오빠들이 귀여워서 이것저것 물어봤고, 딸이 거기에 답하면서 대화에 끼어든 정도다. 그래도 언니 오빠들이 좀 놀란 눈치였다. 일곱 살이 영어를 이렇게 알아듣고 길게 말하는 게 신기했나 보다.

    수업이 끝나면 딸이 나한테 와서 일러주듯이 말했다. 언니 오빠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고. 스파이더맨 이번에 나온 거 봤냐면서 영화 얘기도 하고, 대회 나가는 얘기도 한다고.

    그래서 내가 물었다. 딸도 언니 오빠들이랑 같이 얘기하지 왜. 그랬더니 부끄럽단다.

    펜싱에서 배운 게 말만은 아니다. 대결하기 전에 인사를 하고 끝나면 악수를 한다. 그게 룰이고, 안 지키면 진다는 것까지 배웠다. 딸은 그걸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요즘 딸이 스스로 건진 말이 꽤 된다. 원어민 선생님한테 배운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도 그렇고, 펜싱장에서 주워 온 말들도 그렇다. 내가 시켜서 들어온 게 아니다. 학원비를 낸 것도 아니고 교재를 산 것도 아닌데 딸 입에 붙어 있다.

    7살 한·영·일·프 희망회로, 솔직히 그냥 바람

    원래 우리 집 쉬는 시간은 영어 독서 시간이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여러 번 적었다. 그런데 펜싱을 배우고부터는 숙제하다 중간에 쉴 때 나랑 펜싱 연습을 한다. 제법 스텝을 밟고 잘한다. 연습하면서 알레, 마르쉐 소리를 내고, 또 다른 말은 없냐고 묻기도 한다. 밖에서도 연습하면서 그 말을 쓴다.

    그 모습을 보다가 잠깐 희망회로가 돌아갔다. 우리 딸 일곱 살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까지 다 하는 거 아니야, 하고.

    지금 딸이 만나는 언어를 정리해 보면 넷의 성격이 다 다르다. 영어는 나와 아내가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 다섯 살부터 방향을 잡고 시킨 것이다. 중국어는 8월 18일 화교학교 정식 입학을 앞두고 7월 한 달 기초를 배운 것이고. 일본어는 아이가 스스로 배우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어는 아이가 언어라고 생각조차 안 하고 있다.

    그래서 제일 편해 보인다.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놀이니까. 영어를 할 때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고, 중국어는 학교가 걸려 있고, 일본어는 자기가 하겠다고 했으니 책임감 비슷한 게 붙는다. 그런데 펜싱장에서 나오는 말에는 그런 게 하나도 없다.

    희망회로는 잠깐 스쳐 지나갔다. 물리적인 시간이며 상황이며 다 따져 보면 그냥 바람이다. 지금 영어 공부를 하고 있고, 곧 화교학교에 정식 입학하면 다시 적응해야 하고, 영어와 중국어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뭘 더 얹는 건 욕심이다.

    그래도 나는 그 회로를 잠깐 돌려본 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딸이 뜻도 모르는 말을 신나서 따라 하는 걸 보면, 언어라는 게 결국 저렇게 들어오는 거구나 싶어서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더 시키지 않고, 쉬는 시간에 알레 소리 내며 스텝 밟는 것만 같이 해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