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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산 해운대 엘시티 워터파크 신발장 앞에서 중국인 관광객과 마주치자 말이 막혔다. 휴대전화로 AI와 구글 번역기까지 켰지만 서로 당황하고 예민해진 상황에서는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설명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꾸 엉켰다. 그때 엄마와 함께 나를 찾으러 온 일곱 살 딸이 웃으며 우리 사이로 들어왔다.
AI도 번역기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 신발장 앞
우리 가족이 워터파크에 간 것은 거의 4년 만이었다. 그때 딸은 물에 둥둥 띄워 놓을 정도로 어린 아기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비행 일정으로 늘 바쁜 와이프가 모처럼 시간을 냈고, 나도 회사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 주말이었다. 아이 역시 공부와 학원으로 바쁘게 지냈다. 놀이동산과 워터파크 중 하나를 고르자고 했더니 아이는 둘 다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그날이 아니면 또 언제 셋이 함께 가겠느냐는 마음으로 해운대 엘시티 워터파크로 향했다.
내가 입장권을 발권하고 배정받은 번호의 신발장을 열었는데 안에 다른 사람의 신발이 들어 있었다. 직원에게 말했지만 직원도 조금 의아해했다. 얼마 뒤 신발 주인이 나타났다. 중국에서 온 관광객 아빠와 아들이었다. 그 아빠도 자기 신발장이 왜 열렸는지, 내가 어떻게 열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표정에는 당황스러움과 의심이 함께 묻어 있었다. 나 역시 똑같았다. 나는 직원에게 받은 키로 열었을 뿐인데 설명이 생각처럼 나오지 않았다.
예상한 질문에 답하는 평소 대화와는 전혀 달랐다. 상대방이 나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고, 뒤에서는 워터파크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계속 움직이니 머릿속 문장이 엉켰다. 휴대전화 화면은 이미 켜져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말하는 동안 문장을 입력하고, 번역된 내용을 확인해서 다시 보여주는 일이 그 상황에서는 쉽지 않았다. 도구는 손에 있었지만 나와 중국인 아빠 사이의 예민해진 기운까지 바꿔주지는 못했다.
직원도 바로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내 키로 신발장이 열렸고, 중국인 아빠도 자기에게 배정된 번호라고 하니 누구 말이 맞는지 그 자리에서는 알 수 없었다. 내 잘못도, 중국인 아빠의 잘못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확인되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를 문제의 원인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7살 딸은 웃으며 “친구야?”라고 물었다
내가 한참 동안 들어오지 않자 딸이 엄마와 함께 안내데스크 쪽으로 다시 나왔다. 딸 눈에는 나와 중국인 아빠, 그 아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던 것 같다. 서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우리에게 딸은 웃으며 다가와 “친구야?”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이 조금 황당하면서도 웃겼다. 나는 지금 난처한 일을 겪고 있는데 아이는 아빠가 워터파크에서 새 친구라도 만난 줄 알았던 것이다.
나는 딸에게 신발장 키가 중복으로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딸은 중국인 아빠를 바라보고 영어로 영수증을 보여줄 수 있는지 또박또박 정중하게 부탁했다.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상대가 외국인이라서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 물어본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나와 이야기할 때 조금 예민해 보이던 중국인 아빠의 표정도 달라졌다. 그는 웃으면서 자기 락커 쪽으로 돌아가 영수증 여러 장을 가져왔다. 인터넷으로 언제 표를 샀는지, 몇 시에 입장했는지를 딸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딸은 내 영수증에 적힌 번호와 중국인 아빠의 영수증에 적힌 번호가 정말 같은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해했다.
딸은 그렇다면 그냥 같이 쓰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건넸다. 그 말을 들은 중국인 아빠가 웃었다. 현실적으로 모르는 두 가족이 신발장과 락커를 함께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딸에게는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것보다 같은 번호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재미있는 일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딸이 끼어든 뒤부터 우리 사이의 당황하고 예민했던 기운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중국어와 영어가 가능한 직원이 두 영수증과 시스템을 확인했고, 결국 내 락커키를 다른 번호로 바꿔주었다. 문제를 행정적으로 해결한 사람은 직원이었다. 딸이 무슨 어려운 통역을 해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딸은 영수증 한 장을 부탁하고 몇 마디를 주고받는 동안, 서로를 의심하던 두 어른이 다시 웃게 만들었다. 워터파크 안에서 그 가족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서로 웃고 인사했다. 신발장 앞에서 시작된 일이 나쁜 기억으로 남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영어 교육비 월 80만원보다 오래 남은 장면
딸은 6월 말 영어유치원을 졸업했다. 지금은 월·수·금 영어학원에 다니고, 영어책을 읽는 학원도 일주일에 두세 번 시간이 되면 간다. 나는 그 학원을 끊은 줄 알았는데 다시 다니고 있더라. 영어 라이팅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이고, 2026년 7월부터는 토요일 아침마다 우리 집에서 원어민 선생님과 약 50분 동안 대화하는 수업도 한다. 학원비와 원어민 수업료를 합치면 한 달에 약 80만원이 든다.
와이프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영유 보내고 영어학원 보낸 보람이 있제?”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월 80만원의 결과를 확인한 장면이라고 쓰고 싶지는 않았다. 돈을 많이 썼으니 아이가 외국인에게 영어로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계산은 그날 내가 본 모습과 맞지 않았다. 딸은 배운 문장을 시험하듯 꺼내지 않았고, 영어 실력을 보여주려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나와 중국인 아빠에게는 신발장 번호가 겹친 사건이었지만, 딸에게는 아빠가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친구야?”라고 물었고, 필요한 것이 있으니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영어 문장을 제대로 만들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표정조차 없었다. 그냥 궁금한 것을 묻고 상대의 설명을 들었다. 영어가 별도의 도구라기보다 자기 말 중 하나처럼 보였다.
그 차이가 꽤 오래 남았다. 나는 AI와 번역기를 켜고도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딸은 상대방이 자기를 어떻게 볼지 계산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어쩌면 아이가 잘한 것은 정확한 문장보다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문제를 크게 보고 있었고, 딸은 대화를 시작하면서 그 문제를 쉽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아이에게 공부할 시간은 많이 만들어줬지만, 배운 말을 마음껏 꺼내볼 다양한 경험은 생각보다 많이 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다음 가을에는 기장에 있는 놀이공원의 퍼레이드 참여 프로그램을 꼭 신청해주려고 한다. 퍼레이드를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해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워터파크에서도 하루 종일 웃었던 아이가 그 무대에서는 무엇을 보고 어떤 말을 꺼낼지, 이번에는 내가 먼저 기다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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