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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나는 딸한테 영어책 좀 그만 읽으라고 했다. 하루 종일 그 말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딸이 나를 앉혀놓고 책을 펼쳤다. 자기가 얼마나 재밌게 읽고 있는지 알려주겠다면서. 말리러 갔다가 앉아서 배우고 나온 셈이다. 초등 입학을 앞둔 마지막 주말이었고, 하루 일과를 좀 나눠보려던 계획은 아침부터 어그러졌다. 아내가 카톡으로 잡아준 계획도 같이 날아갔다. 3년째 영어책을 읽히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영유 때는 남는 시간도 영어였다

    영유를 다닐 때는 영어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남는 시간도 영어로 채웠다. 그게 당연했다. 하루를 통으로 영어에 쓰는 게 그 시절의 방식이었으니까. 나도 그 방식에 맞춰서 3년을 살았다. 저녁에 뭘 시킬지 고민할 때 선택지가 영어 안에 다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되면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 영어의 축은 그대로 가져갈 거다. 다만 거기에만 올인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 중국어가 들어오고 수학이 들어오고 한글책도 챙겨야 하니까, 하루를 쪼개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

    말이 쉽지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3년 동안 굳어진 하루를 통째로 다시 짜야 하는 거니까. 뭘 줄이고 뭘 남길지 정하는 건 결국 부모 몫인데, 나는 그 기준이 아직 없다. 그래서 일단 주말에 연습이라도 해보자 싶었던 거다.

    그래서 그 주말에 연습을 좀 해보려고 했다. 아직 학교가 시작된 것도 아니고 방학 중이니까, 미리 하루를 나눠보면서 감을 잡아두면 좋겠다 싶었다. 영어에 몇 시간, 수학에 몇 시간, 한글책에 몇 시간. 그렇게 종이에 적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아침부터 어그러졌다.

    영어책 그만 읽어라, 하루종일 말한 날

    오늘 따라 유난히 밖에서도 책을 읽는 딸

    그날은 푹 자고 일어났다. 주말을 그냥 탱자탱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소중한 주말인 만큼 잘 나눠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유난히 내가 뭐 하나 쳐다볼 때마다 딸이 영어책을 읽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읽고,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읽고, 밥 먹을 때 읽었다. 비가 엄청 와서 배달이 안 되길래 장 보러 가자고 했더니 나가는 길에도 책을 들고 나갔다. 길 가다가 책 읽으면 넘어진다고, 주차장에서는 보지 말라고 계속 말렸다.

    내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동안에도 옆에서 영어책을 읽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심심할까 봐 챙겨간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들고 왔다.

    평소 독서량도 적은 편이 아니다. 평일에는 스스로 읽는 시간만 하루 한 시간이 넘는 것 같고, 주말에는 내가 좀 쉬어야 하니까 그 시간에 읽어서 토요일 세 시간, 일요일 세 시간이 기본이다. 영어학원에서 주는 독서량은 이것과 별개다.

    그래서 그날은 진심으로 말했다. 영어책 좀 그만 읽어라. 영어책 대신 과학 한글책도 좀 읽고, 수학도 좀 풀고, 밀린 영어학원 숙제도 하고, 좀 나눠 가면서 분배를 잘하라고. 하루 종일 그 말을 한 것 같다.

    반응은 반항이었다. 처음에는 내 말을 그냥 못 들은 척했다. 그다음에는 꼭 이것만 읽고 아빠 말대로 하겠단다. 그러고는 또 다음 장을 넘겼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책을 많이 읽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은 아주 흔했다. 재밌단다. 오늘은 책을 좀 많이 읽고 싶단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이 광경이 고마웠을 거다. 다른 사람이나 지인이 이걸 보면 아빠로서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날은 진짜, 좀 분배를 해줬으면 싶었다.

    말해놓고 나도 좀 이상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이 아이가 책을 읽게 하려고 별짓을 다 했다. 밤마다 읽어주고, 책장 자리를 바꾸고, 어떻게 하면 스스로 펼칠까만 생각했다. 그래놓고 그날은 그만 읽으라고 하고 있었다.

    매직트리하우스, 아이가 아빠를 가르쳤다

    아빠한테 영어책을 읽게 하고 가르치는 딸

    그날 붙들고 있던 건 매직트리하우스였다. 잭과 애니가 나오는, 늘 읽던 책이다.

    내 머릿속은 딴 데 가 있었다. 중국어 숙제는 어떻게 하고, 수학은 어떻게 하고, 영어학원 숙제는 어떻게 하고, 한글책은 또 어떻게 하고, 중간중간 산책이나 운동은 어떻게 넣고. 아이와 좀 분배하고 방향을 같이 잡아보려고 했다. 아내는 제주도로 비행을 가 있어서 카톡으로 이거 이거 저거 하라고 계획까지 잡아줬다.

    완전히 물 건너갔다. 앉으라는데 안 앉을 수가 없었다.

    딸이 갑자기 나보고 와보라더니, 이 책이 얼마나 재밌는지 알려주겠다고 앉아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펜을 들고 왜 오늘은 책을 볼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책을 펴고 재미난 부분을 읽어주면서. 하루 종일 말려도 안 되니까 이제 나를 설득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보고 소리 내어 읽어보란다. 답답했지만 시킨 대로 해봤다. 어찌나 해맑은 표정으로 나한테 내용을 알려주고 가르치던지.

    읽다 보니 내가 처음 보는 단어들이 나왔다. 살짝 막히면 아이가 바로 인간 영어사전처럼 발음이랑 뜻을 알려줬다. 그것도 영어 설명으로.

    그 자리가 좀 묘했다. 나는 분명 그만 읽으라고 말하러 간 사람인데, 앉아서 읽고 있고, 틀리면 일곱 살한테 교정을 받고 있었다. 딸은 그게 신나 보였다. 아빠한테 뭘 알려주는 게 재밌었던 모양이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했다. 계속 읽게 놔두는 게 맞나. 할 건 태산인데. 독서가 너무나 좋은 교육이라는 것도 아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아내는 주말 동안 정해준 걸 하라고 하고, 시간은 계속 가고.

    결국 그날 계획한 건 거의 못 했다. 종이에 적어보려던 시간표는 시작도 못 했고, 딸은 원하는 만큼 읽었다.

    다행인 건 아이가 장난치고 논다든지 쓸데없는 영상 보겠다고 조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영어책을 읽는 건데. 이게 나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말리고 있나 싶다가도, 그날 안 한 숙제가 눈에 밟혀서 또 마음이 급해진다.

    3년 동안 아이를 그렇게 밀착해서 케어해왔는데, 지금도 매번 두 갈래 앞에 서서 고민한다. 진짜 뭐가 맞나. 노는 것도 아니고 재밌는 영상 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토록 바라던 영어책을 계속 읽고 싶다는 건데. 하지만 다른 것도 밸런스 맞춰서 분배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나. 진짜 누가 답 좀 알려주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