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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딸이 내 눈을 딱 보면서 말했다. 아빠 그렇게 읽으면 재미가 없다고. 그렇게 읽으면 책을 다 못 읽는다고. 소파에서 영어책을 읽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시작된 일이었다. 나는 거의 독박으로 공부며 케어를 다 하는 아빠인데, 그날은 완전히 입장이 바뀌었다. 앉아서 지적받는 쪽이 나였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딸이 나를 부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날 그냥 같이 놀자는 줄로만 알았다.

유아 영어독서, 아빠를 혼내려다 생긴 일
우리 딸 특기가 영어책 읽기다. 워낙 많이 읽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도 영어책 읽는 걸 좋아한다. 조금 꼴불견일 수도 있는데 밖에 잠깐 나갈 때도 책을 들고 나가서 걸으면서 읽는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계속 말리는 편이다.
그날도 한소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사실 나도 안다. 책 읽는 걸 말리는 게 좀 이상하다는 걸. 예전에 같은 영어책만 반복해서 읽을 때는 말리지 않았다고 적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밖에서 읽는 것만은 말리고 있다. 걸어가면서 책을 보면 넘어지거나 차를 못 볼 수 있으니까 그건 안 된다고 하는 거다. 딸 입장에서는 그게 억울했을 거다. 자기는 재밌게 읽고 있었을 뿐인데 아빠가 자꾸 덮으라고 하니까.
딸이 소파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나보고 와보라고 했다. 그래서 갔더니 아빠도 해야 된단다. 뭘 해야 되냐고 하니까 책을 한 페이지씩 읽어보잔다. 한 페이지는 아빠, 한 페이지는 자기.
이 제안 자체가 나는 좀 신기했다. 규칙이 명확했다. 순서를 정하고 역할을 나누는 걸 자기가 알아서 짰다.
그래서 내가 읽었다. 그런데 바로 제지당했다.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단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읽어야 한단다. 여자면 여자처럼, 남자면 남자처럼, 괴물이면 괴물처럼 흉내를 내면서 읽으라는 거다.
나는 그냥 내 목소리로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나 진심이던지. 장난치는 말투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학생한테 하는 말투에 가까웠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그냥 같이 읽자는 게 아니라 다른 뜻이 있었다는 걸. 나는 아이가 심심해서 부른 줄로만 알았다.
영어 그림책 읽기, 손동작에 잡아먹기까지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시범을 보였다. 손동작까지 하면서.
먼저 자기가 한 페이지를 읽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하는 얼굴로. 나는 그냥 구경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끝나자마자 이제 아빠 차례라고 했다.
아주 신나는 장면에서는 신나게 읽었다. 목소리가 올라가고 몸도 같이 움직였다. 그러다 무서운 장면이 나오니까 손을 치켜올리면서 나를 잡아먹듯이 다가왔다.
내가 무서워하는 척을 했더니 너무 좋아했다. 그러고는 다시 집중 모드로 돌아가서 조용히 읽었다. 그 전환이 아주 빨랐다.
그 모습을 보면서 좀 놀랐다. 신나게 연기하다가 바로 차분해지고, 다시 다음 장면이 오면 또 올라간다. 책 안에서 뭐가 나오는지에 따라 몸이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문제는 나였다. 몇 장 읽다 보니 머리가 멍해졌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힘도 빠졌다. 목소리를 바꿔가며 읽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나는 회사에서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거랑은 종류가 다른 피로였다.
그런데 아이는 계속 신나 있었다. 그렇게 억지로 한 20페이지는 읽었나 싶다. 처음 몇 장은 나도 재밌었는데 그 뒤로는 솔직히 버티는 쪽이었다.
결국 나는 전화 받는 척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지금 적어놓고 보니 좀 부끄러운데 그때는 정말 더 못 하겠더라.
자리를 뜨는 나를 보던 딸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물음표 표정이었다. 재밌는데 왜 가지, 하는 얼굴. 그러더니 혼자 조용히 읽었다.
내가 빠지고 나서도 아이는 그 책을 계속 읽었다. 나 때문에 시작한 놀이가 아니었던 거다. 나는 그냥 잠깐 불려 들어간 상대역이었을 뿐이다.
아무도 안 가르쳤는데, 몸속에서 신이 난다는 것
나중에 물어봤다. 생각해보니 어디서 들어봄직한 영어독서 방법 같은데, 이걸 어떻게 배웠나 싶었다.
알려준 사람이 없단다. 선생님도 책 읽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없고, 엄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그냥 혼자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에 마음속으로 그렇게 읽으니까 몸속에서 신이 난다는 거다.
이 대답이 나는 제일 인상적이었다. 소리 내서 읽을 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혼자 눈으로 읽을 때도 머릿속에서는 이미 목소리를 나눠서 읽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밖에서 보면 그냥 조용히 책 보는 아이인데 안에서는 사람이 여럿 떠들고 있었던 거다.
언제부터 그랬냐고도 물어봤다. 자기도 모른단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몸속에서 막 신나고 무서운 건 무섭단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무서운 장면이 나왔는데 책은 안 덮는다. 그런데 화장실이 가고 싶다면서 나보고 같이 가달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무서워서 같이 가야 한단다.
레인보우 매직이라는 책이었을 거다. 내가 볼 때는 무서운 장면도 아니었다. 너무 몰입했나 싶어서 내가 오해할 정도였다. 어른 눈에는 그냥 지나가는 대목인데 아이한테는 그게 진짜였던 모양이다.
그게 너무 귀여웠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도대체 얼마나 상상을 한 건가 싶다. 무섭다면서 그 책을 놓지도 않고 계속 들고 있었으니까. 아이들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건지 정말 궁금하게 만든다.
무서우면 덮으면 되는데 안 덮는다. 무서운 채로 계속 읽는다. 그리고 그 무서움을 혼자 감당하기는 싫어서 아빠를 화장실까지 데려간다. 어른 기준으로는 앞뒤가 안 맞는데 아이 안에서는 그게 다 말이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알아낸 게 있다. 왜 그날 나를 불렀냐고 물어봤더니, 아까 내가 혼내서 책 읽기로 아빠를 혼내고 싶었단다. 그런데 도움도 되는 거란다.
그 말을 듣고 한참 웃었다. 혼났으니까 갚아주고 싶은데, 그 방법으로 고른 게 영어책 같이 읽기였다는 게. 그것도 아빠한테 도움이 되는 쪽으로 골랐다는 게.
혼내려고 시작한 건데 나도 모르게 즐기고 있었다. 소리 내고 흉내 내면서 읽는 게 힘들긴 했어도 싫지는 않았다. 아이가 생각보다 지능적인 건가. 아빠를 혼낼 때 영어책 읽게 해서 복수를 하는 건가. 다음에 또 밖에서 책 읽지 말라고 하면 나는 또 소파로 불려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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