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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아이가 Owl Diaries를 읽으면서 혼자 킥킥거렸습니다. 아침부터 저를 붙들고 무슨 내용인지 설명하더니, 다시 책으로 돌아가 한참을 웃었습니다.

    일곱 살 아이가 소파에서 영어책 Owl Diaries를 읽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아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떤 책들을 거쳤던가. 그래서 몇 권을 꺼내 늘어놓고, 각 책의 레벨 지수를 찾아봤습니다. 그러다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레벨은 같은데 쪽수가 두 배인 책

    Magic Tree House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기본 시리즈와 Merlin Missions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것은 Merlin Missions 쪽입니다.

    매직트리하우스 멀린 미션 4권 표지

    두 시리즈의 숫자를 나란히 놓아 봤습니다. 참고로 렉사일은 영어책의 난이도를 숫자로 나타낸 지수입니다. 숫자가 높을수록 어렵습니다.

    기본 시리즈는 권장 연령이 6세에서 9세입니다. 렉사일은 380L에서 590L이고, 한 권이 70쪽 안팎입니다.

    Merlin Missions는 권장 연령이 7세에서 10세입니다. 렉사일은 460L에서 590L인데, 한 권이 100쪽을 넘습니다.

    렉사일 상한이 590L로 똑같습니다. 그런데 쪽수는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숫자만 보면 거의 같은 난이도인데 실제로 아이가 들고 있어야 하는 시간은 완전히 다릅니다.

    지수가 무엇을 재는지 확인해 봤습니다

    이상해서 렉사일이 어떻게 계산되는지 찾아봤습니다. 지수를 만든 MetaMetrics의 설명은 명확했습니다. 렉사일은 두 가지로 계산됩니다. 단어가 얼마나 흔한 단어인지, 그리고 문장이 얼마나 긴지. 이 둘뿐입니다.

    책이 몇 쪽인지는 계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얼마나 복잡한지도, 그림이 얼마나 있는지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렉사일 쪽에서도 이 지수는 글의 난이도만 나타낼 뿐 내용이나 책의 구성은 담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AR 지수와 렉사일을 어디까지 보면 되는지는 전에 한 번 정리해 두었습니다. 이번에 확인한 것은 그 지수들이 애초에 무엇을 재고 있느냐였습니다.

    그러니 같은 590L이 나온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작가가 문장을 더 어렵게 쓴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문장 하나하나는 그대로인데 권수만 두꺼워진 셈이라, 문장만 재는 지수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좀 놀랐습니다. 그동안 지수를 기준으로 책을 고르면 얼추 맞겠거니 생각했는데, 정작 아이가 중간에 책을 덮는 이유는 그 지수가 재지 않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수로는 안 보이는 것 세 가지

    이 기준으로 집에 있는 책들을 다시 보니 세 가지가 걸러졌습니다.

    첫째는 분량입니다. 어휘가 되어도 100쪽을 붙잡고 있을 체력이 안 되면 중간에 덮습니다. 지수는 이걸 재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한 번 더 막혔습니다. 우리 아이를 보면 두께를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입니다. 두꺼운 책을 앞에 두고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본인이 꽂히면 쪽수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시간이 더 걸릴 뿐 끝까지 봅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벽은 분량 자체가 아닙니다. 분량이 벽이 되느냐 마느냐를 정하는 것은 몰입입니다. 빠져든 아이에게 100쪽은 그냥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이고, 빠져들지 못한 아이에게는 100쪽이 그대로 벽입니다. 같은 책 같은 쪽수인데 결과가 갈립니다. 그리고 이 몰입도야말로 지수가 가장 잴 수 없는 항목입니다.

    둘째는 그림입니다. Franny K. Stein과 Merlin Missions는 둘 다 가이디드 리딩 N단계입니다. 그런데 Franny는 챕터가 짧고 거의 모든 쪽에 그림이 있습니다. 글자에서 막혀도 그림이 이야기를 이어 줍니다. Merlin Missions에서는 그 도움이 크게 줄어듭니다. 같은 N인데 아이가 느끼는 무게는 다릅니다.

    셋째는 문장의 성격입니다. Nate the Great은 가이디드 리딩 K단계로 앞의 둘보다 낮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만만치 않은 이유는 단어가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탐정이 짧고 건조한 문장으로 혼자 말하는 방식이라, 뜻은 알겠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문장이 짧으면 지수는 낮게 나옵니다. 짧은 문장이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것까지는 숫자가 담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수 이전에 있는 벽 하나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우리 집 책 중에 Oxford Read and Imagine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영어를 배우는 아이를 위해 만든 책입니다. 단계마다 쓸 수 있는 단어를 정해 두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듭니다. 모르는 단어가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반면 Nate the Great이나 Owl Diaries는 영어권 아이들이 그냥 읽는 책입니다. 작가가 학습자를 생각하지 않고 썼습니다. 두께가 비슷해도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보호대가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이 벽은 지수로 보이지 않습니다. 학습용 사다리를 몇 단계 더 올라가는 것으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냥 쓰인 책을 한 권 쥐여 줘야 넘어갑니다.

    숫자를 찾기 전에 책을 들어 보는 편이 빠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수는 문장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려 줍니다. 아이가 한 권을 끝까지 읽어 낼 수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둘은 다른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검색으로 숫자를 찾기 전에 책을 직접 들어 봅니다. 몇 쪽인지, 한 쪽에 그림이 얼마나 있는지, 챕터가 얼마나 긴지. 이 셋은 손에 쥐면 삼십 초면 확인됩니다. 아이에게 직접 고르게 하면 이 확인을 아이가 대신 해 주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아이가 직접 고르게 했던 날에 적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정말 읽고 있는지는 어차피 지수로 알 수 없습니다. 그건 따로 확인해야 하는 문제라 영어책 내용을 아는지 확인한 방법에 적어 두었습니다.

    지수가 재지 못하는 것 때문에 생긴 고민

    마지막으로 아직 답을 못 찾은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아이가 두꺼운 책에 한번 빠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숙제를 못 하고 넘어간 날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지금도 고민입니다.

    책을 붙잡고 있는 아이를 중간에 끊는 일이 저는 늘 어렵습니다. 숙제는 해야 하는데, 지금 이 아이가 책에 들어가 있는 이 상태가 제가 삼 년 동안 만들고 싶었던 바로 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제 손으로 끊는 게 맞는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레벨 지수는 이런 것까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어떤 책이 아이를 이렇게 붙잡아 둘지, 붙잡힌 아이를 언제 놓아 주어야 할지는 숫자 바깥의 일입니다. 그날그날 부모가 직접 판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