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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차장 뒷좌석에서 패드 대신 얇은 영어 종이책을 소리 내어 읽는 아이

    집에 돌아와 그날 본 영어책 줄거리를 물었더니, 딸은 줄거리는 빼고 이렇게만 답했습니다. "아까 4개 맞았어." 이야기는 기억에 없고 점수만 또렷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날 아이한테 남은 건 영어 문장보다 점수판 쪽이었습니다.

    그 영어책은 패드 화면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주말 오후, 세차하는 동안 딸은 뒷좌석에서 패드를 들고 짧은 영어책과 퀴즈를 번갈아 봤습니다. 그런데 아이 손은 책장보다 정답 버튼을 먼저 찾았습니다. "이거 맞으면 별 올라가?" 하고 묻고는, 별점이 오르면 좋아했어요. 그 순간엔 저도 웃었습니다. 영어를 싫어하지도 않고 혼자 앉아 뭔가 하고 있으니, 아빠 입장에선 편했거든요.

    아이는 화면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딸이 뭘 잘못한 게 아니었습니다. 패드 영어는 별점과 정답 버튼으로 아이를 움직이게 설계돼 있습니다. 문장을 곱씹어도 점수는 안 오르고, 버튼을 맞히면 별이 오릅니다. 그러면 아이 손은 당연히 별이 오르는 쪽으로 갑니다. 퀴즈도 대개 '누가 무엇을 했나' 같은 사실 확인이라, 이야기를 느끼지 않아도 버튼만 잘 누르면 별이 쌓였습니다. 잘 만든 앱일수록 이 회로가 매끄럽습니다. 한 권을 끝내면 다음 권이 자동으로 뜨고, 별이 쌓이고, 화면이 칭찬합니다. 아이를 계속 앉아 있게 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그 '앉아 있음'이 곧 '읽음'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제 쪽이었습니다. 패드 영어는 부모한테 정말 편합니다. 책이 알아서 나오고, 음원도 붙어 있고, 채점까지 자동입니다. 퇴근하고 와서 숙제에 리딩까지 같이 봐야 하는 날, 그 편리함은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아이한테 좋은 도구를 쥐여줬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제가 해야 할 몫을 화면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전에 젤리를 걸고 책을 읽히려다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땐 보상을 제가 직접 걸었고 이번엔 화면이 대신 걸어줬다는 차이만 있었어요.

    점수가 없는 책을 같이 폅니다

    그래서 패드를 없애는 대신, 점수가 없는 책을 같이 펴기 시작했습니다. 얇은 종이책 하나를 골라 아이가 소리 내어 읽게 하고, 다 읽으면 채점 대신 "무슨 얘기였어?"를 물었습니다. 종이책에는 누를 버튼도, 올라갈 별도 없습니다. 맞히고 틀리고가 없으니 아이도 점수 쪽으로 샐 데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이건 별 안 올라가?" 하고 심심해했지만, 며칠 지나니 자기가 읽은 장면을 한두 마디씩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패드를 나쁜 물건으로 모는 건 아닙니다. 발음이나 음원을 들려주기엔 화면이 편하고, 저도 여전히 씁니다. 다만 패드를 아이 앉혀두는 도구로 쓰던 걸 멈추고, '점수 말고 이야기를 말해줘'를 한 번씩 끼우게 됐습니다.

    솔직히 패드는 지금도 가방 안에 있고, 여전히 편합니다. 피곤한 저녁엔 저도 모르게 다시 쥐여주고 싶어져요. 그날 세차장 일로 패드를 끊게 된 건 아닙니다. 다만 아이가 별점을 쫓고 있는지 이야기를 쫓고 있는지, 그것 하나는 한 번씩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지금 제가 지키는 선은 거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