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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영어독서학원을 마치고 온 딸이 책가방에서 초록 괴물 그림책을 꺼냈습니다. 집에는 아직 안 펼친 새 영어책도 있었고, 영어유치원 리딩 숙제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손은 또 그 책으로 갔습니다.

    솔직히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반복해서 같은 영어책을 읽는 딸

     

    이미 읽은 책인데 왜 또 읽지?

    새 책을 봐야 단어도 늘고, 권수도 늘고, 레벨도 올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이미 본 책을 다시 꺼내면 시간이 조금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딸이 괴물 얼굴이 크게 나온 장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처음 읽을 때와 달리 목소리를 낮게 깔았습니다. 이빨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입을 크게 벌렸고, 무서운 척하다가 혼자 웃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입을 닫았습니다.

    아이는 같은 책을 다시 읽는 게 아니었습니다. 같은 책 안에서 다른 놀이를 꺼내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걸 싫어하는 아이가 괴물 책에 빠진 이유

    딸은 원래 무서운 걸 좋아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혼자 가기 싫어할 때가 많았습니다. “왜?” 하고 물으면 대답은 늘 비슷했습니다.

    “무서워.”

    그런 아이가 초록 괴물 책에는 이상하게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어느 포인트에 꽂힌 건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며칠 같이 읽다 보니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괴물이 무서운 말을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If you don't sleep at night...” 같은 문장을 괴물 목소리로 읽으면, 저는 일부러 크게 놀랐습니다.

    “아이고 무서워. 아이고 무서워.”

    그러면 딸은 더 신났습니다. 평소에는 무서운 걸 피하던 아이가, 그 책 안에서는 아빠를 겁주는 쪽이 됐습니다. 아이는 무서운 책을 읽은 게 아니라, 무서운 척하는 역할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 나니 같은 책을 또 꺼내는 모습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딸은 그 책을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꺼냈습니다. 어제도 읽었는데 오늘 또 가져오면 저도 사람인지라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야, 너 그 책 다 외우겠다. 이제 그만.”

    그런데도 아이는 다시 펼쳤습니다. 괴물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또 목소리를 낮췄고, 저는 또 겁먹어 줬습니다. 솔직히 조금 지겨웠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책에 그렇게 빠졌는데, 거기서 딱 끊어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책을 반복하는 게 항상 제자리걸음은 아니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같은 영어책을 계속 고르는 모습이 답답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미 읽은 책을 또 읽으면 시간이 아깝게 느껴집니다. 특히 영어유치원이나 영어독서학원을 다니면 더 그렇습니다. 원비도 들고, 숙제도 있고, 레벨도 신경 쓰이니까요.

    그런데 7살 아이에게 같은 책은 항상 같은 책이 아닐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글자를 따라갑니다. 두 번째는 그림을 봅니다. 세 번째는 목소리를 바꿔봅니다. 어느 날은 단어보다 장면을 기억하고, 어느 날은 문장을 자기 식으로 흉내 냅니다.

    초록 괴물 책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글자를 읽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자 아이는 괴물 대사가 나오는 부분을 기다렸습니다. 그 장면이 오면 목소리를 낮추고, 아빠가 겁먹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걸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부모 눈에 보이는 모습 아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같은 책을 또 읽음 문장에 익숙해지는 중
    좋아하는 장면만 반복함 책 안에서 자기 역할을 찾는 중
    목소리를 바꿔 읽음 표현을 붙여보는 중
    부모 반응을 기다림 읽기를 놀이로 바꾸는 중

    반복 읽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더 편하게 읽고, 더 자연스럽게 말하고, 표현을 붙여가는 과정입니다. 집에서는 이걸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읽는지보다, 아이가 그 책 안에서 뭘 새로 하고 있는지를 봤습니다.

    초록 괴물 책에서는 그게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아빠를 겁주는 놀이였습니다.

    새 책을 들이밀기 전에 본 것

    그날 이후로 아이가 같은 책을 또 꺼내도 바로 새 책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세 가지를 봤습니다.

    • 아이가 더 편하게 읽는가
    • 목소리나 표정이 달라지는가
    • 그 책으로 놀이가 만들어지는가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보이면 조금 더 뒀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있어도 아이 안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무 변화 없이 글자만 지나가거나, 외워서 빨리 끝내려는 느낌이 강하면 그때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책을 바꾸기보다 질문을 먼저 바꿨습니다.

    “또 이 책이야?” 대신
    “오늘은 어떤 목소리로 읽을 거야?”

    “다 읽었어?” 대신
    “아빠가 제일 무서워해야 되는 장면 어디야?”

    “이제 다른 책 보자.” 대신
    “이 괴물이 좋아할 만한 책 하나만 옆에 둘까?”

    이렇게 바꾸면 아이가 덜 밀려났습니다. 부모가 책을 바꾸자고 끌고 가는 느낌보다, 아이가 좋아한 장면 옆에 다른 책을 살짝 놓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실제로 저는 초록 괴물 책 옆에 완전히 다른 책을 두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느낌이 있는 책을 옆에 뒀습니다. 밤 장면이 있거나, 이상한 얼굴이 나오거나, 반복되는 문장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바로 읽지는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책상 위에 있다가 어느 날 한 번 넘겨보면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결국 질리긴 했습니다

    재밌는 건, 그렇게 질리도록 보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 책을 덜 찾았습니다. 부모가 억지로 끊지 않아도 아이 안에서 충분히 놀고 나면 빠져나오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 배웠습니다. 애들도 질릴 만큼 해야 끝나는 게 있습니다.

    아이의 반복을 너무 빨리 끊지 않아도 되겠구나. 대신 그 반복 안에서 아이가 뭘 하고 있는지는 봐야겠구나.

    글자를 외우는지, 목소리를 바꾸는지, 장면을 기다리는지, 아빠를 겁주는 놀이를 하는지. 그걸 보면 같은 책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딸의 강점은 반복입니다. 하나에 꽂히면 질리도록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답답할 때도 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그만큼 깊게 들어가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영어책도 그랬습니다. 새 책을 많이 읽는 날도 필요하지만, 한 권을 질리도록 붙잡는 날도 있었습니다. 같은 책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하게, 일부러 쉬운 책으로 레벨을 낮춰 다시 읽는 날도 굳이 막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쉬운 책을 다시 꺼내는 아이에 따로 적었습니다. 초록 괴물 책은 새 단어를 많이 준 책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아이가 영어 문장을 자기 목소리로 꺼내고, 아빠 반응까지 끌어내며 놀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같은 영어책을 또 꺼내도 바로 안 막습니다. 먼저 봅니다.

    이 책을 또 읽는 건지,
    이 책으로 또 놀고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