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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현관 앞에 택배상자 세 개가 쌓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씻기 전이었고, 저는 박스를 접어야 했습니다. 영어를 하려고 만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박스가 많았습니다.

    아이 손에는 얇은 영어 그림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제가 읽자고 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낮에 읽다 만 탈것 그림책이었고, 아이가 종이가방 안에 넣어 들고 나왔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습니다. 그 순간 “그럼 내려가서 한 번 읽어볼까?”라고 말하면 바로 숙제가 될 것 같았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는 거울을 봤습니다. 책은 종이가방 안에 반쯤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박스를 발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영어는 한마디도 안 나왔습니다.

    책을 펼치기 전에 나온 말

    지하 1층 분리수거장 앞에서 박스를 접는데, 상자 옆면에 작은 트럭 그림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그걸 먼저 봤습니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꾹 눌렀습니다.

    “Delivery truck.”

    정확히는 질문처럼 말했습니다. 끝을 살짝 올렸습니다. 제가 바로 설명을 붙일 수도 있었습니다. delivery truck은 뭐고, van은 뭐고, truck은 크고, carry는 싣는다는 뜻이고. 그런데 그 많은 설명이 그 자리에는 안 맞았습니다.

    아이 말이 나온 순서는 이랬습니다.

    먼저 본 것 택배상자 그림
    그다음 들은 것 지하주차장 차 소리
    아이 입에서 나온 말 Delivery truck
    제가 한 반응 Yes. Delivery truck.

    이 표로 적으면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그날 제 입장에서는 꽤 큰 차이였습니다. 보통은 아이가 영어 단어를 말하면 바로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제대로 아는지,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지, 뜻까지 연결되는지 알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확인이 들어가는 순간 아이는 대답하는 사람이 됩니다.

    유아 언어 자료에서도 아이가 실제 상황 속에서 말할 기회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영국 Department for Education의 communication and language 자료도 놀이와 일상 상호작용 안에서 말이 자라는 환경을 강조합니다. 저는 그 문장을 거창하게 적용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날은 더 묻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줄였더니 책이 나중에 열렸다

    분리수거를 끝내고 올라오려는데 아이가 종이가방에서 책을 꺼냈습니다. 제가 “읽어볼까?”라고 말해서 꺼낸 게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꺼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책장을 두 장 넘겼습니다. van 그림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van 그림과 박스 그림을 번갈아 떠올리는 것처럼 잠깐 멈췄습니다.

    “Like delivery truck.”

    저는 그때도 설명을 길게 붙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말하고 싶었습니다. van이랑 delivery truck은 똑같지 않다고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분류보다 먼저 볼 게 있었습니다. 아이가 방금 자기 머릿속에서 두 장면을 붙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책 읽어주기 방식 중에는 아이가 말한 내용을 받아주고, 너무 빨리 정답을 밀어 넣지 않는 대화식 읽기 방식이 자주 언급됩니다. Reading Rockets의 Dialogic Reading 자료에서도 아이가 말하고 어른이 반응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그날 분리수거장에서는 책을 펴고 앉은 건 아니었지만, 흐름은 비슷했습니다. 아이가 먼저 보고, 먼저 말하고, 저는 짧게 받았습니다.

    집에 올라와서 책을 끝까지 읽었냐고 하면 아닙니다. 끝까지 안 읽었습니다. 아이는 현관에 책을 내려놓고 물부터 마셨습니다. 저는 책을 다시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이미 한 번 연결이 나왔으니까 거기서 멈춰도 된다고 봤습니다.

    예전 같으면 저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 잡았을 겁니다.

    “그럼 truck이 뭐야?”

    “van은 뭐가 달라?”

    “문장으로 다시 말해봐.”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는 박스 버리러 내려갔다가 갑자기 영어 확인 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럼 다음부터는 책을 들고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이상하게 아쉬운 상태로 끝냈습니다. 더 시킬 수 있었는데 안 시킨 상태. 더 설명할 수 있었는데 멈춘 상태. 부모 입장에서는 조금 덜 한 것 같은데, 아이 입장에서는 부담 없이 지나간 상태였습니다.

    분리수거장 영어가 특별한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책상 밖에서 아이가 먼저 본 것에 영어가 붙은 날이었습니다. 택배상자에 그려진 트럭 하나, 지하주차장 차 소리, 종이가방 안에 있던 얇은 책. 그 셋이 잠깐 겹쳤습니다.

    다음 날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날은 박스를 버리러 내려가자마자 아이가 냄새난다고 코를 막았습니다. 책은 들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더 현실에 가깝습니다. 매일 되는 루틴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 잡히는 장면입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리자 아이는 책을 현관 바닥에 내려놓고 먼저 욕실 쪽으로 갔습니다. 종이가방 손잡이는 한쪽만 뒤집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