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영어유치원 가방에서 나온 영어 기사 프린트를 보며 아이와 영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

    나는 그날 아이 영어를 읽은 게 아니라 채점하고 있었다.

    영어유치원 가방에서 접힌 프린트 한 장이 나왔습니다. 숙제장인 줄 알았는데 얇은 영어 기사였습니다. 글자는 꽤 많았고, 사진은 한쪽에 작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본 것은 글자였습니다.

    단어를 아는지, 문장을 읽을 수 있는지, 내용을 이해했는지, 이 정도 기사면 지금 아이 수준에 맞는지.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딸은 달랐습니다.

    글자를 먼저 훑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봤습니다. 사진 속에는 길 위에 남은 흔적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발자국 같기도 했고, 지나간 자국 같기도 했습니다.

    딸은 손가락으로 사진 한쪽을 짚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Maybe it is lost.”

    그 말을 듣고도 저는 바로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판정이 시작됐습니다.

    문장이 맞나. it이 뭘 가리키는 걸까. 기사 내용을 제대로 본 걸까. lost를 어디서 배웠지. maybe를 쓴 건 좋은데, 이걸 이해했다고 봐야 하나.

    그 순간 제 문제가 보였습니다.

    아이는 추측하고 있었고, 저는 판정하고 있었습니다.

    영어 결정적 시기라는 말을 너무 많이 보면 부모 머릿속에 이상한 표가 생깁니다. 몇 살이면 어느 정도 읽어야 하고, 어느 레벨이면 어떤 문장을 알아야 하고, 이 정도 노출이면 이런 아웃풋이 나와야 한다는 표입니다.

    그 표는 아이 앞에 실제로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제 머릿속에만 있었습니다.

    딸은 그날 프린트 앞에서 시험을 본 게 아니었습니다. 사진을 보고, 아는 단어 몇 개를 붙잡고, 자기 생각을 하나 꺼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도 속도를 재고 있었습니다.

    빠른가.

    느린가.

    부족한가.

    이 정도면 괜찮은가.

    이 질문들이 먼저 나오면 아이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 안 보입니다.

    딸은 문장을 완벽하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기사 전체를 줄줄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상황을 짐작했습니다. 확실히 안다고 말하지 않고 maybe를 붙였습니다.

    그건 틀릴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어 있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날 단어 뜻을 하나씩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물었습니다.

    “그럼 네가 이 기사 제목을 만든다면 뭐라고 할래?”

    딸은 바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프린트를 접었다가 다시 폈습니다. 사진을 보고, 첫 줄을 보고, 다시 사진을 봤습니다.

    한참 뒤에 짧게 말했습니다.

    “Lost animal.”

    멋진 제목은 아니었습니다. 정답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딸이 본 사진, 딸이 꺼낸 maybe, 딸이 고른 lost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틀린 지점이 조금 더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영어 실력을 결과물로 보려고 했습니다. 아이는 영어를 재료로 써보고 있었습니다.

    읽기량은 중요합니다. 단어도 중요합니다. 문장 이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확인하는 눈이 너무 앞서면, 아이가 자기 머릿속에서 문장을 움직여보는 시간이 사라집니다.

    저는 그날 아이가 영어를 잘했다고 적고 싶지 않습니다.

    그 표현도 또 하나의 판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날 기록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입니다.

    그날의 오판

    나는 글자를 먼저 봤다.

    아이는 사진을 먼저 봤다.

    나는 속도를 재려고 했다.

    아이는 상황을 짐작했다.

    나는 이해했는지 확인하려 했다.

    아이는 maybe를 꺼냈다.

    이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프린트는 다시 가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 뒤에 단어장을 만들지 않았고, 기사 내용을 다시 설명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는 지웠습니다.

    아이 영어를 보자마자 머릿속에 올라오던 속도표.

    그 표는 그날 필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