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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날 현관 우산꽂이 앞에서 아이가 젖은 바닥을 보며 영어책 문장을 떠올리는 장면

    영어유치원에 보내면 아이가 단어를 제법 가져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서 “그거 무슨 뜻이야?” 하고 물으면 멀뚱한 경우가 많아요. 분명 원에서 배웠고 발음도 하는데 뜻이 몸에 안 붙은 겁니다. 저도 한동안은 단어장을 다시 펴서 확인하는 식으로만 복습을 시켰는데, 효과가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방향이 바뀐 건 비 오던 어느 저녁이었어요. 현관에 들어선 딸이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더니 “It's raining again”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낮게 “The floor is wet”이라고 붙이자, 딸은 발끝을 들고 젖은 타일을 피해 걸었습니다. wet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어요. 눈앞에 젖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그 저녁 이후로 집에서 단어를 살리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오늘은 그 방법을 정리해봅니다.

    단어가 책상에서는 잘 안 붙는 이유

    책상에서 wet은 외워야 할 항목입니다. 현관 바닥 앞에서 wet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이고요. 차이는 거기에 있습니다. 아이는 모르는 단어라도 눈앞 상황이 받쳐주면 뜻을 짐작해서 가져갑니다. 반대로 상황 없이 단어만 떼어 놓으면 소리는 내도 의미는 겉돌기 쉽습니다. 그래서 집에서의 복습은 ‘단어를 다시 묻는 일’이 아니라 ‘그 단어가 닿을 상황을 옆에 만들어 주는 일’에 가깝습니다.

    가방 속 물건 하나로 3분, 이렇게 합니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숙제장을 펴기 전 3분, 아이 가방에서 그날 나온 물건 하나를 같이 봅니다. 비 온 날엔 우산, 어떤 날은 친구가 준 종이, 간식 봉지, 스티커, 젖은 양말 같은 것들이요. 순서는 이렇게 잡았습니다.

    1. 먼저 영어로 묻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미 손에 쥔 물건을 따라갑니다.
    2. 그 물건에 딱 닿는 짧은 문장 하나만 골라 옆에 슬쩍 놓아줍니다. 스티커가 젖었으면 “It's wet”, 봉지가 미끄러우면 “It's slippery” 정도면 충분합니다.
    3. 한 번 낮게 말하고 넘어갑니다. 따라 하라고 다그치지 않습니다.

    물건을 늘리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물병이 차가우면 “It's cold”, 가방이 무거우면 “It's heavy”, 양말 한 짝이 안 보이면 “Where is it?”처럼, 그날 손에 잡힌 것에 한 문장씩 붙이면 됩니다. 핵심은 문장이 그 순간을 설명하게 두는 거예요. 그러면 단어가 숙제 항목이 아니라 지금 벌어진 일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대신 이건 안 했습니다

    한 가지 안 한 게 있습니다. 시험처럼 “이거 무슨 뜻이야?”라고 되묻는 것이요. 그렇게 물으면 아이가 채점받는 기분이 들어 입을 닫더라고요. 알려주고 싶을 때도 설명을 길게 붙이지 않았습니다. 한 문장이면 됐어요.

    그리고 솔직히 매일 한 건 아닙니다. 식자재 영업을 마치고 늦게 들어온 날은 그냥 숙제부터 끝내고 눕고 싶었고, 아이도 피곤하면 시큰둥했습니다. 그런 날은 넘어갔어요. 매일 하려고 들면 이것도 또 하나의 숙제가 되니까요. 여유 있는 날 한 번씩이면 충분합니다.

    그래도 흔적은 남습니다. 며칠 뒤 리딩북에서 비 오는 페이지를 만났을 때, 딸은 그냥 넘기지 않았어요. 창밖을 보는 그림을 짚으며 “raining”이라고 말하고는, 현관 쪽을 한 번 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