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부터 딸은 인형들을 작은 의자에 줄지어 앉히고 같은 말을 합니다. “Please sit down.” 표정이 제법 진지해요. 누가 가르친 적도, 제가 먼저 영어를 꺼낸 적도 없었습니다. 처음엔 어디서 나온 말인가 싶었는데, 거슬러 올라가 보니 출발점이 하나 있었어요. 비행 다녀온 엄마 가방에서 나온 안전카드 한 장이었습니다.
벨트를 채우던 그날의 손
그날 딸이 캐리어 옆 파우치에서 꺼낸 건 기내 안전카드였습니다. 벨트 그림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어요. “Seat belt?” 제가 낮게 “Fasten your seat belt”라고 하자, 딸은 단어 뜻을 묻는 대신 의자에 앉아 허리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벨트를 채우는 흉내였어요.
“fasten은 매다라는 뜻이야” 같은 설명은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했으면 금세 공부가 됐을 거예요. 대신 저도 허리에 손을 댔고, 딸은 그걸 보고 따라 했습니다. 일곱 살한테는 뜻풀이 한 줄보다 손이 한 번 움직이는 게 더 확실한 설명이었어요. 그날 fasten은 외운 단어가 아니라, 허리에 손을 대는 그 동작과 한 몸이 된 말이 됐습니다.
그 뒤로 며칠, 딸은 벨트만 보면 손이 허리로 갔습니다. 차에 타면 자기 벨트부터 손으로 더듬었고, 인형을 어딘가에 앉힐 때도 같은 손짓이 나왔어요. 그 동작이 며칠 뒤 놀이에서도 다시 나오는 게 제 눈에는 신기했습니다.
며칠 뒤, 인형에게 돌아온 말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안전카드는 옆에 없었고 저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딸이 인형을 작은 의자에 앉히더니 허리 쪽을 만지며 말했습니다. “Please sit down.” 안전카드를 보며 했던 동작과 닮아 보여 저는 그날이 떠올랐습니다. 이 문장을 어디에서 처음 배웠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시키지 않은 말이 인형놀이 안에서 나온 것은 분명했어요.
저는 칭찬으로 흐름을 끊는 대신 인형을 하나 더 손에 쥐여줬어요. 놀이에 소품 하나 보탠 셈이죠. 딸은 그 인형도 의자에 앉히고 다시 말했습니다. “Sit down.” 그러고는 인형들이 잘 앉았는지 하나씩 확인하듯 둘러봤어요. 그 모습이 마치 작은 안전 안내를 하는 승무원 같았습니다. 영어가 시험처럼 확인받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든 놀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기 말이 되어 나오고 있었어요.
제게 오래 남은 것은 딸이 같은 동작을 놀이에서 다시 꺼냈다는 장면이었습니다. 몸으로 해본 말이 외운 말보다 언제나 오래 기억된다는 결론은 아닙니다. 영어유치원 진도와 숙제만 보던 제 눈에, 인형을 앉히며 쓰는 영어도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날 이후로는 새 교재를 먼저 찾기보다 아이가 이미 벌여 놓은 놀이를 옆에서 조금 더 보게 됐습니다.
요즘도 딸은 인형들을 의자에 줄지어 앉힙니다. 그날 그 안전카드는 진작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인형을 하나씩 자리에 앉힐 때마다 딸은 여전히 같은 말을 해요. “Sit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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