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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좋다, 저 책이 좋다 — 아이 영어책을 두고 부모들이 가장 많이 나누는 말일 겁니다. 게다가 아이들 책은 은근히 비쌉니다. 그래도 교육이라면 과감하게 지갑을 여는 게 우리나라 부모들이라, 아이와 상의도 없이 덜컥 좋다는 책을 사다 놓고 “읽어 봐”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읽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선물인 줄 알고 받아 들었더니 또 책입니다. 유치원에서도 책, 집에서도 책. 아이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만도 합니다. 물론 타고나길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그만한 복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딸도 처음부터 책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초보 아빠 시절엔 좋다는 책을 알아보고, 선배들에게 “이 책은 꼭 읽혀 둬야 한다”는 조언도 구하고, 그렇게 사다 놓곤 했습니다. 아이마다 성향이 다 다르니 정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에게 가장 확실했던 방법은 따로 있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함께 서점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대형 서점은 도서관과 다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만족이었습니다. 요즘 대형 서점은 예쁘게 잘 꾸며져 있고, 아이들도 많이 옵니다. 볼거리, 놀거리도 은근히 많고, 음악도 흘러나옵니다. 도서관처럼 딱딱하고 조용해서 숨죽여야 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굳이 유아 영어책 코너로 데려가지 않아도 아이가 알아서 잘 찾아갔습니다. 이 책 저 책 집어 보고, 예쁜 그림책부터 시작해서 처음 보는 영어책도 펼쳐 보고, 영어 글만 빼곡한 책도 잠깐 들춰 봤습니다.
그중엔 과학책도 한 권 있었습니다. 표지가 알록달록하고, 종이며 그림 퀄리티도 좋은, 베스트 추천 도서였습니다. 그런데 딸은 몇 장 넘겨 보더니 도로 덮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아직 아이 수준에 맞지 않으면 손이 가지 않는 거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른도 그렇습니다. 두껍고 어려워 보이는 책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큰맘 먹고 펼쳤다가도 금세 덮어 버리니까요.
저도 옆에서 유아 영어책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흥미가 생겼습니다. 마침 바로 옆에 작은 의자와 소파가 있어서, 제가 먼저 책 한 권을 들고 앉아 읽었습니다.
책을 보며 웃는 아이가 제 딸이라니
그러자 아이도 한 권을 골라 왔습니다. 팬시 낸시(Fancy Nancy) 시리즈였습니다. 갈색 곱슬머리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 여자아이들이 곧잘 보는 책인 모양이었습니다. 딸은 그 책을 펼치더니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제 그만 가자” 했는데, 딸은 대답도 없이 책을 보며 히히 웃고 있었습니다. 그 깨알같이 웃는 얼굴, 웃는 소리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요. 책을 보며 웃는 아이가 제 딸이라니. 그 순간 서점에 데려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그 시리즈를 샀습니다. 만약 집에서 폰으로 사진만 보여주고 “이거 샀어” 하며 책장에 꽂아 뒀다면, 딸이 이렇게까지 빠져들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예쁜 옷을 사진으로만 보고 사는 것보다, 매장에서 직접 입어 보고 고른 옷에 더 손이 가지 않습니까. 아이의 책도 그랬습니다. 제가 정해서 안긴 책보다, 아이가 제 눈으로 보고 제 손으로 고른 책이 결국 끝까지 읽혔습니다.
아이가 고르는 수준을 알면 거기서부터 올려 줄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런 걱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계속 그 수준의 쉬운 책만 찾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지켜보니, 순서의 문제였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고르는 책의 수준을 일단 알고 나면, 그때부터는 부모가 어느 정도 추천해도 됩니다. 그 수준을 기준 삼아 한 칸 위 책을 찾아 슬쩍 곁에 놓아 주는 겁니다. 처음부터 부모가 정한 책을 들이밀 때와, 아이 수준을 확인한 뒤 거기서 한 걸음 올려 줄 때는 아이가 받아들이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그렇게 책의 레벨이 조금씩 올라갑니다.
그러는 사이, 인형을 손에 쥐고 놀던 아이는 책장을 넘기는 재미에 빠져 갔습니다. 변한 건 아이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점에 다녀올 때마다 한 권씩 늘던 책이 이제는 책장 하나를 새로 채웠고, 우리 집은 어느새 책이 많은 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거실 어디서든 손만 뻗으면 책이 닿습니다. 그 책장을 볼 때마다, 솔직히 좀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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