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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유치원을 졸업한 뒤 아이에게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정해진 숙제와 단어시험을 따라가던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자,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정신적·물리적 시간이 생겼다. 다른 영유 부모들보다 조금 먼저 이런 여유를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 아이가 일반적인 초등학교 입학 코스를 밟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래 영유 아이들보다 몇 달 먼저 영유 생활을 끝내고, 7월 중순부터 화교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학교로 옮겼으니 오히려 영어가 줄어들까 걱정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 무렵의 걱정은 영어유치원 졸업하고 화교학교 갔더니 사라진 것에 적어 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영어를 확인하는 말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매일 영어를 확인하던 아빠였다
영어유치원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비슷한 말을 했다.
숙제 다 했어?
영어단어는 몇 개 맞았어?
라이팅은 끝냈어?
책은 읽었어?
아이의 영어 실력이 궁금해서라기보다,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게 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반복했던 말이었다. 숙제가 많았고 단어시험도 계속 있었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아이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의 영어를 볼 때도 먼저 숙제와 점수부터 확인했다. 아이가 영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보다 오늘 해야 할 영어를 얼마나 끝냈는지가 더 잘 보였다.
영유를 졸업하자 내 말부터 줄었다

영어유치원을 졸업하고 나니 매일 확인해야 할 숙제가 줄었다. 물론 지금도 영어학원 숙제가 있고 챙겨야 할 공부가 있다. 영어를 완전히 놓은 것도 아니다. 다만 하루 종일 영어숙제와 단어시험을 따라가던 때와는 달라졌다.
아이에게 "숙제했어?"라고 묻는 횟수가 줄었고, 나도 잠시 입을 닫을 수 있게 됐다. 그러자 전에는 보이지 않던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영어책을 펼쳤다. 숙제와 상관없이, 쉬면서 넘기는 책이었다. 책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하면 나에게 보여주거나 영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씻고 나온 뒤 머리를 말리는 시간에는 혼자 영어 노래를 만들었다. 정확히 외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몸짓과 표정을 섞어가며 작은 영어 뮤지컬을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릴 때 튀어나오는 영어와는 또 달랐다.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때 나오는 영어였다.
나는 그동안 아이가 영어를 잘하고 있는지 계속 확인했지만, 정작 아이가 스스로 영어를 꺼내는 순간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시작한 영어를 다시 숙제로 만들기도 했다
아이가 먼저 영어책을 읽거나 영어로 이야기하면 반가웠다.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영어 실력이 더 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을 붙였다.
그 책을 다 읽어보자.
그 내용을 영어로 써볼까?
방금 말한 문장으로 라이팅을 해보자.
잘 이어질 때도 있었다. 아이가 재미있어하며 문장을 더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조금 전까지 노래하고 이야기하던 영어가 다시 해야 하는 공부로 바뀐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알게 됐다. 아이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영어라고 해서 매번 학습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가 보기에는 좋은 기회지만, 아이에게는 그냥 놀고 쉬는 시간일 수 있었다.
영어가 남아 있는지는 점수만으로 알 수 없었다
영어유치원을 졸업하고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학교로 옮기면 영어 실력이 줄어들까 걱정하게 된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단어를 얼마나 기억하는지, 책의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영어로 말할 때 막히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점수만 보면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학원 등급표를 받아 들었을 때 이미 겪은 적이 있다.
아이에게 영어가 남아 있는지는 시험점수나 숙제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영어책을 펼치는지.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 영어로 말해보고 싶어 하는지. 노래와 놀이 속에서 영어가 자연스럽게 나오는지.
이런 장면에도 아이의 현재 영어가 들어 있었다. 영어를 잘하게 만드는 방법만 찾다 보면, 아이가 이미 사용하고 있는 영어를 놓칠 수 있다.
부모가 할 일은 더 시키는 것만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영어숙제를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학원을 다니면 숙제를 해야 하고, 단어시험도 준비해야 한다. 아이가 하기 싫다고 할 때마다 모두 기다려줄 수도 없다.
앞으로도 나는 "영어 숙제했어?"라고 물을 것이다. 다만 그 말만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영어책을 펼치는 순간, 머리를 말리며 영어 뮤지컬을 시작하는 순간, 책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어로 들려주는 순간도 함께 보려고 한다.
영어를 더 시키는 것만큼 아이가 스스로 영어를 꺼낼 수 있는 시간과 상황을 끊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영유를 졸업하고 생긴 작은 여유 덕분에 알게 됐다. 내가 잠시 입을 닫자 아이의 영어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숙제와 점수 뒤에 가려져 있던 아이의 영어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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