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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학원에서 보내준 결과 화면을 열었다. 등급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C가 있었고 어떤 답변에는 F가 찍혀 있었다.

    7월부터 다니기 시작한 학원에는 패드로 AI와 대화하는 수업이 있다. AI가 영어로 질문을 하면 아이가 답을 녹음하고, 그 답변을 분석해 등급을 매긴다.

    처음에는 AI가 일곱 살 아이의 발음을 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우리 딸은 영어를 꽤 편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거실에서 패드로 영어 공부하는 일곱 살

    말은 많이 했는데 등급은 내려갔다

    녹음을 들어보니 아이는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고 한두 단어로 끝내지도 않았다. 자기가 알아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꽤 긴 이야기를 했다. 옆에서 듣고만 있으면 잘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답변이었다.

    그런데 질문과 답을 나란히 놓고 들어보니 사정이 달랐다. 아이는 영어가 막혀서 헤맨 게 아니었다. 질문이 무엇을 묻는지 정확히 잡지 못한 채, 자기가 이해한 방향으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말은 술술 나왔는데 질문과 답의 방향이 어긋나 있었다. AI 영어앱 점수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직접 써보며 따로 적어둔 적이 있다. 다만 이번에 걸린 것은 점수의 정확도보다 내가 놓치고 있던 지점이었다.

    유창함과 이해력은 자라는 속도가 다르다

    이 일을 겪고 찾아본 개념이 있다. 언어학자 짐 커민스가 1979년에 제시한 구분이다. 그는 제2언어 능력을 일상 대화에 쓰는 유창성과 학습에 필요한 언어 능력으로 나눠 봐야 한다고 했다.

    두 능력은 자라는 속도가 크게 다르다. 대화 유창성은 언어에 몰입한 뒤 대략 2년이면 실제로 쓸 만한 수준에 이른다. 반면 수업 내용을 또래 원어민만큼 소화하는 언어 능력을 따라잡는 데는 보통 5년에서 7년이 걸린다.

    커민스가 특히 경고한 지점이 있다. 아이가 운동장에서 또래처럼 말한다는 이유로 두 능력을 같은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구분을 놓쳐서 언어 지원이 필요한 아이를 너무 일찍 일반 수업으로 내보내는 일이 반복됐다고 했다.

    물론 이 연구는 이민 가정 학령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우리 딸은 한국에서 영어유치원을 다닌 일곱 살이다. 상황이 똑같지는 않다. 그래도 겉으로 드러나는 유창함이 안쪽 능력을 다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영어책을 잘 읽는 것과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따로 확인해야 했던 경험과 같은 결이었다.

    모르는 줄 아는 아이가 오히려 낫다

    딸은 원어민 선생님과 이야기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입을 다물지 않는다.

    "Can you explain it in another way?"

    문장이 매번 똑같지는 않지만 뜻은 분명하다. 지금 설명으로는 모르겠으니 조금 다르게 말해 달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더 쉬운 단어로 바꾸고 예시를 들어 다시 묻는다. 아이가 뜻을 알아차리면 대화가 이어진다.

    나는 그 모습을 높게 평가했다. 모르는 단어 하나에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완벽한 문장이 준비될 때까지 침묵하지 않는 힘이라고 봤다. 그 판단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물어볼 수 있다. 선생님에게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거나 부모가 쉬운 말로 풀어주면 된다. 뜻을 확인하고 대화를 이어가면 그만이다.

    더 찾기 어려운 순간은 따로 있었다. 질문을 잘못 이해했는데 자신은 제대로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이다.

    모르는 줄 알면 물어볼 수 있다. 잘못 알아들은 줄도 모르면 자신 있게 다른 답을 할 수 있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 아이였다면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질문을 듣고 가만히 있거나 모르겠다고 말할 테니 부모도 신호를 받는다. 그런데 말문이 열린 아이는 다르다. 알아들은 단어 몇 개와 질문의 분위기만으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문장이 길고 발음이 자연스러우니 겉으로는 대화가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유창해질수록 빈틈이 덜 보인다. 이 역설을 나는 결과 화면을 보고서야 알았다.

    다시 녹음시키는 대신 한국어로 물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모르는 영어가 나오면 모르는 척을 숨기지 않는다.

    "딸아, 아빠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아빠는 영어유치원을 안 다녀서 그런가?"

    그러면 딸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는다.

    "아빠, 그것도 몰라?"

    그리고 자기가 아는 말로 설명해 준다. 아이가 선생님이 되고 내가 학생이 되는 순간이다. 이런 대화를 계속해서인지 딸도 모르는 영어 앞에서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낮은 등급을 확인한 뒤에도 정답을 알려주거나 다시 녹음하라고 하지 않았다. 질문 하나만 바꿔서 물었다.

    "아까 AI가 너한테 무엇을 물어본 거였어?"

    영어로 설명하라고 하지 않았다. 한국어로 답해도 된다고 했다. 확인하려는 것이 영어 실력이 아니라 아이가 그 문장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는지였기 때문이다.

    답이 갈리면 도와주는 방법도 갈린다

    이 한 문장을 물어보면 결과가 두 갈래로 나온다.

    아이가 질문의 뜻은 정확히 설명하는데 영어로는 다른 답을 했다면 말하기 쪽 문제에 가깝다. 하고 싶었던 말을 짧은 영어 문장으로 바꿔주면 된다. 표현의 재료가 부족한 상황이니 그 자리에서 채워주면 다음번에 꺼내 쓸 수 있다.

    반대로 한국어로 다시 물어봐도 질문의 뜻을 다르게 설명한다면 듣기와 어휘 쪽이다. 이때는 정답 문장을 알려줘도 남는 게 적다. 질문 속 핵심 단어 하나와 그 문장이 무엇을 묻는 형태인지부터 다시 확인해야 한다.

    같은 낮은 점수인데 원인이 다르고 대응도 달라야 한다.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다시 녹음시키면 아이는 이유도 모른 채 같은 자리를 반복한다.

    말은 끝까지 듣고 방향만 확인한다

    여기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아이가 질문과 다른 말을 한다고 대화 중간마다 끊어버리면 지금 가진 가장 좋은 장점을 잃는다.

    딸의 장점은 완벽하지 않아도 입을 열고, 아는 영어를 꺼내 쓰고, 막히는 상황에서도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 힘을 꺾어가면서까지 정확한 답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순서를 정했다. 말할 때는 끝까지 말하게 두고, 답이 끝난 뒤에 질문의 방향만 한 번 확인한다.

    매번 검사하지도 않는다. 점수가 유독 낮거나 질문과 답이 크게 어긋나 보이는 날, 한 문제만 골라서 묻는다. 아까 질문이 무엇을 물어본 거였어, 어떤 단어가 헷갈렸어, 한국말로 먼저 답한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어. 세 문장이면 충분하다.

    나이에 따라 무게를 조절할 수도 있다. 세 살이나 네 살은 그림이나 영상을 가리키며 뭘 물어본 것 같으냐고만 물어도 된다.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은 알아들은 단어 하나를 말하게 해볼 수 있다. 일곱 살쯤 되면 질문을 자기 말로 바꿔 설명하게 할 수 있다.

    영어를 술술 말하는 아이를 보면 부모는 마음이 놓인다. 나도 그랬다. 문장이 길어지고 원어민과 대화가 이어지고 모르는 단어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으니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판단이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유창함은 아이의 빈틈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오래 말하는 힘과 뜻을 정확히 잡는 힘은 따로 봐야 했다.

    이제 등급이 낮게 나와도 다시 녹음부터 시키지 않는다. 아이 말을 다 듣고 한 번만 묻는다.

    "그런데 아까 질문은 무엇을 물어본 거였어?"

    이 한 문장이면 아이가 영어를 몰랐는지, 알면서 표현하지 못했는지, 질문의 방향을 다르게 잡았는지가 조금씩 갈려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