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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아빠가 혼낼 때 한글 이름을 많이 불렀던 것 같은데, 너도 알아?”
이번에는 딸의 한글 이름을 부드럽게 부른 뒤 물었다. 아이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한글 이름이 싫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도 자기 이름이라고 했다. 다만 영어 이름으로 있을 때는 영어를 조금 더 잘하게 되는 것 같고, 칭찬을 듣는 것 같고, 무엇이든 잘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예전에 아이는 같은 느낌을 ‘스위치’라는 말로 설명한 적이 있다.
“영어 이름을 부르면 영어를 잘하는 스위치를 누르는 것 같아.”
나는 그동안 딸에게 이름이 두 개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두 이름을 똑같은 목소리로 불러온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아이가 골랐다
딸에게 두 개의 이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한글 이름 옆에 영어 이름이 놓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금씩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입학을 준비하며 영어 이름을 정할 때 여러 가지 이름을 아이에게 말해줬다. 그중에서 딸이 마음에 들어 한 이름이 엘리자베스였다. 부모가 정해서 알려준 이름이 아니라, 여러 이름을 들어본 아이가 직접 고른 이름이었다.
영어유치원에서는 이름을 줄이지 않았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3년 동안 딸을 엘리자베스라고 풀네임으로 불렀다. 그곳에서는 특별한 호칭이 아니라 매일 듣는 이름이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이 모두 엘리자베스라고 불렀다. 아침과 저녁에 아이를 부를 때 나도 한글 이름보다 엘리자베스를 더 자주 사용했던 것 같다.
영어유치원에서만 잠깐 쓰고 두고 오는 이름이었다면 아이에게 지금과 같은 의미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치원에서 불리던 이름을 가족도 집에서 계속 불렀다. 아이가 고른 이름을 선생님과 친구들, 가족이 함께 불러준 시간이 3년 동안 쌓였다.
영어책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발견한 적도 있다.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딸이 자기 영어 이름이 책에 나왔다며 기뻐했던 모습은 기억한다. 내 눈에는 아이가 책 속 이름을 남의 이름으로만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반응처럼 보였다.
영어 이름으로 있으면 칭찬을 듣는 것 같다고 했다
일곱 살 초반, 딸은 이름이 두 개라서 좋다고 말했다. 한글 이름도 좋고 영어 이름도 좋은데, 영어 이름이 조금 더 편하고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어 이름을 부르면 영어를 잘하는 스위치를 누르는 것 같다는 표현을 먼저 꺼냈다.
스위치라는 말을 내가 알려주거나 답을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기분이 좋은 날 자기 이름 이야기를 하다가 스스로 한 말이었다.
이번에 다시 물었을 때 아이의 설명은 조금 더 길어졌다. 영어 이름으로 있을 때는 영어를 더 잘하게 되는 것 같고, 칭찬을 듣는 것 같고, 다 잘되는 것 같다고 했다.
엘리자베스라고 부른다고 실제 영어 실력이 갑자기 달라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름을 바꾸어 불러가며 시험해본 것도 아니다. 내가 확실히 적을 수 있는 것은 아이가 영어 이름에 그런 기분을 붙여놓았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두 이름 중 어느 것이 진짜 이름인지 묻는 것은 아이에게 맞지 않는 질문일 수 있다. 딸은 한글 이름도 자기 이름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영어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이름과 가짜 이름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두 이름을 들을 때 따라오는 기분이 조금 달랐다.
한글 이름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어진 가족의 시간이 있다. 엘리자베스에는 아이가 직접 골랐다는 기억과 영어유치원에서 3년 동안 생활한 시간이 있다. 아이는 어느 하나를 버리지 않고 두 이름을 모두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글 이름이 싫은 것이 아니라 아빠의 목소리가 달랐다
두 이름을 다르게 만든 사람 중에는 나도 있었다.
평소 아이를 부를 때는 “엘리자베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런데 숙제를 하지 않거나 여러 번 말해도 듣지 않을 때는 한글 이름을 또렷하고 단호하게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아이는 “네…”라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내 반응을 살피면서 같이 짜증을 내기도 했다. 내가 정말 화가 났다고 느끼거나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표정이 굳고 얌전히 말을 들었다.
나는 이번에 아이와 이름 이야기를 나누면서야 이 차이를 의식했다. 그래서 딸에게 아빠가 혼낼 때 한글 이름을 많이 불렀던 것 같은데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한글 이름이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 이름이라고 했다.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글 이름을 부르며 물었을 때도 아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장면을 보고 한글 이름이 아이의 기분을 굳게 만든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반응한 것은 이름보다 그때의 상황과 내 목소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한글 이름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이름을 단호한 목소리가 필요한 순간에 더 자주 꺼냈다는 데 있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에는 영어를 잘하는 느낌과 칭찬받는 기분이 붙어 있었다. 반면 한글 이름에는 내가 숙제나 잘못한 행동을 이야기하던 목소리가 조금 더 자주 따라붙었을 수 있다. 이것은 아이가 한글 이름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두 이름에 서로 다른 장면을 쌓아왔다는 뜻에 가까웠다.
앞으로 영어 이름을 덜 부르려는 것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아이가 직접 골랐고, 3년 동안 살아온 자기 이름이다. 대신 칭찬할 때와 안아줄 때, 함께 웃을 때도 한글 이름을 더 자주 불러주려고 한다.
딸에게 이름이 두 개라는 사실보다 내가 두 이름을 다른 목소리로 불러왔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남았다. 고쳐야 할 것은 아이의 두 이름이 아니었다. 그 이름 위에 내가 얹어온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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