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영어 영상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한 편이 끝나기도 전에 리모컨을 들고 다음 화면을 눌렀다.노래가 후렴으로 가기도 전에 다음 썸네일을 찾았다. 조금 보다 또 넘겼다.그날 내가 처음 눈여겨본 것은 영어가 아니었다.딸 손가락이었다.그동안 나는 영어 영상을 몇 분 봤는지에 더 신경을 썼다. 오래 보면 너무 오래 본 것 같았고, 영어로 보고 있으면 그래도 영어를 듣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그런데 딸이 계속 다음 화면을 찾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30분을 봤다는 숫자보다 한 영상에 얼마나 머물렀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한 편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영상을 찾고 있었다딸 손에는 리모컨이 있었다.한 영상을 보고 있는데도 손가락은 이미 다음 화면을 준비하고 있었다.나는 그날 리모컨을 뺏지 않았다.대..
호주 공항에서 딸이 내 뒤가 아니라 직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나는 짐과 커피를 들고 있었고, 딸은 자기 작은 가방을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딸은 자기 가방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잠깐 쉴 수 있는 곳도 찾으려고 했다.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생각이 한참 멀리 갔다.이 아이가 언젠가 해외에서 공부해도 되지 않을까.조기유학이라는 단어가 그때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딸이 영어를 잘해서만은 아니었다.내 뒤에 숨어서 내가 해결해주길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궁금한 걸 직원에게 직접 물어보는 모습이 좋았다.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내가 공항에서 본 장면과 내가 내린 판단 사이가 너무 멀었다.공항에서 몇 마디 했는데 나는 미래까지 생각했다공항에서 내가 본 건 짧은 시간이었다.딸은..
딸이 영어책을 펴놓고 본문은 보지 않은 채 페이지 구석만 한참 보고 있었다.작은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딸은 글자를 따라가지 않고 그 동물이 다음 페이지에도 있는지 찾고 있었다.나는 옆에서 보다가 한마디 할 뻔했다.“본문을 봐야지.”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을 바로 못 했다.갑자기 내가 초등학생 때 했던 방학 숙제가 생각났다.나는 친구 독후감을 베껴서 방학 숙제로 냈다나는 어릴 때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글자를 못 읽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책 한 권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게 어려웠다.책을 펴도 몇 장 지나지 않아 다른 생각을 했고, 방학이 되면 독후감 숙제가 제일 싫었다.당시 방학 숙제로 일기 서른 편과 독후감 서른 편을 써야 했던 기억이 있다.일기도 밀렸지만 독후감은 더 막막했다.책을 읽지 않았으니 쓸 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