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독서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그런데 친구가 집에 온 뒤, 딸의 영어책은 조금 다른 물건이 됐습니다. 혼자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 됐습니다.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딸 입에서 한 친구 이름이 자주 나왔습니다. 밥 먹다가도 나왔고, 장난감을 만지다가도 나왔습니다. 그냥 같은 반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 집까지 이어지고 싶은 이름처럼 들렸습니다.스케줄을 맞춰 그 친구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책 읽히려고 부른 건 아니었습니다. 놀고, 간식 먹고, 다시 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친구가 오기 전부터 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장난감보다 책 바구니를 먼저 봤습니다. 평소 읽던 영어책을 아무렇게나 꺼낸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씩 넘겨보더니 따로 빼놓기 시작했습니다.웃긴 장면이 있는 책은 ..
영어유치원 상담표를 받아오면 이상하게 좋은 말보다 애매한 말이 먼저 보입니다. 잘하고 있다는 문장은 잠깐 기분이 좋고, 조금 더 지켜보자는 문장은 오래 남습니다. 저는 상담표를 펼쳐놓고도 아이 얼굴보다 종이 위 문장을 먼저 보고 있었습니다.그날도 그랬습니다. 가방에서 상담표를 꺼냈고, 아이는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적어준 문장을 읽었습니다. 발표, 참여, 친구 관계, 수업 태도. 단어는 다 익숙한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유치원에서는 잘한다고 적혀 있는데 집에서는 말이 줄어드는 날이 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는 발표를 한다는데 아빠 앞에서는 “몰라”로 끝나는 날도 있습니다. 상담표를 읽는 순간 저는 자꾸 둘 중 하나를 고르려고 했습니다. 유치원 모습이 진짜인지, 집 모습이..
영어만 시작하면 표정이 달라졌습니다아이는 영어유치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집에서 영어를 하자고 하면 반응이 달랐습니다."싫어요.""나중에 할래.""안 할 거예요."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영어책을 꺼내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고, 단어 카드만 보여줘도 몸을 돌렸습니다.괜히 더 시켰다가 영어 자체를 싫어하게 될까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솔직히 말하면 조급했습니다.영어유치원을 다니고 있으니 집에서도 뭔가 더 해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다른 아이들은 영어책도 잘 읽는다는데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무엇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이것저것 찾아봤지만 오히려 부담만 커졌습니다.공부를 내려놓고 색종이를 꺼냈습니다어느 날은 그냥 포기했습니다..
딸은 그 책을 처음부터 영어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5살 무렵 미녀와 야수 그림책을 펼쳤을 때, 아이가 오래 본 것은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노란 드레스, 성 안의 계단, 등장인물의 얼굴, 촛대처럼 생긴 캐릭터, 반짝이는 분위기였습니다.저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글자를 봤습니다. 딸은 그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는 얼굴이라기보다 책 속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시간을 독서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그냥 그림만 보는 줄 알았습니다.그런데 나중에 알았습니다. 아이는 글자를 건너뛴 게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그 세계에 먼저 들어가고 있었습니다.공연을 보고 온 날 그게 다시 보였습니다.뮤지컬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딸은 티켓 반쪽과 배우들과..
딸이 처음으로 영어 문장을 자기 입으로 길게 말한 건, 책상도 수업도 아닌 거울 앞에서였습니다. 좋아하는 공주가 나오는 책을 옆에 펴 두고, 거울을 보며 그 공주가 된 것처럼 대사를 따라 했습니다. 그냥 그 장면이 되고 싶어서 입이 먼저 움직였습니다.딸은 공주를 정말 좋아합니다. 만화든 영화든 공주가 나오는 건 거의 다 찾아봤을 정도이고, 그것도 꼭 드레스를 입은 공주여야 합니다. 왜 그렇게 그 공주책을 자주 꺼내는지, 책장 이야기는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그 좋아하는 마음이 책장에서 멈추지 않고 거울 앞까지 간 거였습니다.거울 앞에서 딸이 제일 먼저 하는 건 턴입니다. 틈만 나면 빙글 돕니다. 특히 치마나 드레스를 입은 날엔 턴을 할 때마다 치마가 동그랗게 펼쳐지는데,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이 스스로도 ..
영어유치원과 학원을 같이 다니기 시작한 첫 주였습니다.집에 돌아오니 식탁 위에는 영어유치원 워크북과 리딩북, 학원에서 가져온 프린트가 같이 올라왔습니다.딸은 양말 한쪽을 벗은 채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고, 저는 오늘 뭘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세고 있었습니다.그러다 작은 종이에 줄을 두 개 그었습니다.위에는 딸이 할 일.아래에는 아빠가 할 일.딸이 그 종이를 보더니 아빠도 할 일이 있냐는 식으로 물었습니다.적어놓고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학원을 하나 더 다니는 건 딸에게 수업 하나가 추가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처음에는 딸 시간표만 봤습니다병행을 결정할 때 제가 먼저 본 것은 수업이었습니다.영어유치원에서 배우는 것과 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얼마나 겹치는지, 학원을 하나 더 다니면 무엇을 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