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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말 한마디에 자유가 주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이 마음이 정말 그 말 한마디로 바뀐 건지는 모르겠다.
화교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한 딸이 갑자기 나보고 이제 영어 공부는 따로 하지 말라고 했다.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내가 계속 옆에 앉아 숙제를 봐줬는데, 초등학교 1학년이 되자 자기가 알아서 하겠단다. 자기가 영어를 더 잘하니까 이제는 아빠를 가르쳐주겠다고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섭섭하기보다 속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먼저 들었다. 박사님들은 알려나. 나는 모르겠다. 학교 선생님이 단호하게 말해서 그런 건지,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스스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야기하려면 2년 반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유 2년 반, 나도 딸도 수험생처럼 살았다
딸은 다섯 살부터 영어유치원을 다녔다. 2년하고도 반년을 더 다녔다. 그동안 딸의 영어 공부며 다른 공부는 거의 내가 맡아서 케어했다.
와이프가 승무원이라 김포공항 근처에 오피스텔을 월세로 잡아두고 출퇴근한다. 비행이 없는 날에야 부산 집으로 내려온다. 그래서 평일에는 내가 회사에서 퇴근한 순간부터 딸이 잠들 때까지가 온전히 내 영역이었다. 씻기고 밥 먹이고 숙제를 봐주고 책을 읽히고 재우는 것까지 내가 했다.
영어유치원 숙제는 정말 장난 아니게 많았다. 리딩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쓰는 것도 있었고 외우는 것도 있었고, 발표수업이 있으면 말하는 연습까지 시켜야 했다. 여기에 수학학원 숙제와 다른 영어학원 숙제도 있었다.
딸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내가 퇴근해서 씻고 바로 책상에 앉으면 그나마 시간이 딱 맞았다. 해야 할 것을 다 하고 잠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퇴근길에 차가 막혀 내가 조금만 늦으면 그날 저녁은 바로 빠듯해졌다. 아이가 어려운 부분에서 막히면 이해시키는 데 시간이 들었고, 발표가 있는 날에는 몇 번 더 연습시키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참 나도 딸도 수험생처럼 살았다. 나는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다시 책상에 앉았고, 딸은 영어유치원에서 하루를 보내고도 저녁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둘 다 피곤했는데 해야 할 것은 매일 새로 생겼다.
와이프와 나는 교육철학이 조금 달랐다. 와이프는 해야 할 일을 다 끝내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숙제를 다 마칠 때까지 재우지 않은 날도 있었다. 밤 11시가 지나고 12시가 가까워졌다. 나도 밤 10시만 되면 피곤한데 일곱 살도 안 된 아이는 오죽했겠나.
딸은 20분인지 30분인지 한참을 울었다. 울음을 타이르고 다시 숙제하게 하는 시간까지 더해지니 밤은 더 늦어졌다. 나도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내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와이프가 잠깐 보지 않을 때 딸을 안아주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저녁을 보내고도 다음 날이면 다시 같은 일상이 시작됐다. 나는 숙제를 다 했는지 확인했고, 모르는 것은 같이 찾았고, 발표문을 들어주고 영어책을 따라 읽었다. 딸이 영어로 대답해 달라고 하면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꺼내서 대답하려고 했다. 영어는 딸의 공부였지만, 2년 반 동안은 사실 내 저녁 공부이기도 했다.
화교학교 선생님 말 한마디에 내가 처음 물러났다
딸이 화교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셈이다. 입학하고 영어학원 숙제를 하자고 했더니 전과 달리 딸이 먼저 숙제를 펼쳤다. 내가 옆에서 순서를 정해주거나 이것부터 하자고 말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깐 그러는 줄 알았다. 영유를 다닐 때도 컨디션이 좋으면 혼자 잘하는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내가 확인해야 했고, 어려운 것이 나오면 나를 불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내가 물었다.
“이제 영어 숙제할 때 아빠가 안 도와줘도 돼?”
딸은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아예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 붙어 있으라는 뜻도 아니었다. 정말 딱 조금만 도와주면 된단다.
왜 갑자기 달라졌는지 물었더니 학교 선생님이 스스로 하라고 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싶었다. 내가 2년 반 동안 옆에서 숙제를 봐주며 수없이 했던 말보다 선생님의 ‘스스로’ 한마디가 더 크게 들어간 것 같았다.
선생님이 아주 단호하게 말한 것일까. 아니면 아이가 초등학생이 됐다는 사실을 스스로 크게 받아들인 것일까. 나는 학교에서 그 말을 들은 장면을 본 것이 아니어서 알 수 없다. 딸에게 확인한 것은 선생님이 스스로 하라고 했다는 말까지다.
그 말을 듣는데 내가 그동안 스트레스를 꽉 받고 있었구나 싶었다. 갑자기 자유가 주어진 것 같았다. 날아갈 것 같았고, 꽉 막혀 있던 것이 내려가면서 소화가 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고 보니 딸이 영어유치원에 다닌 2년 반 동안 내가 좋아하던 드라마를 한 편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딸과 함께 보는 영어 영상이나 과학 영상이었다. 유튜브 쇼츠조차 거의 보지 않았다. 퇴근 후 시간은 늘 숙제와 책과 다음 날 준비로 꽉 차 있었다.
누가 나한테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다. 딸이 뒤처질까 봐, 숙제를 빠뜨릴까 봐, 내일 힘들어질까 봐 내가 계속 붙어서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딸이 먼저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아빠는 영어 공부하지 마, 내가 가르쳐줄게
딸은 영어학원 숙제를 하다가 나를 불렀다. 문제를 보여주면서 이거 맞혀보라고 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내가 문제를 먼저 읽고 딸에게 설명했을 텐데, 이번에는 딸이 답을 알려줬다.
그러더니 이제 나보고 영어 공부를 따로 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가 더 잘하니까 자기가 아빠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단다. 예전에는 나한테 영어로 대답해 달라고 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1학년이 되자 이제 자기가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니까 자기가 알려주겠다는 거였다.
딸이 알려준 영어 문제나 답보다 그 앞에 붙인 말이 자꾸 생각났다.
“아빠는 이제 영어 공부하지 마.”
영어가 싫다는 말이 아니었다. 숙제를 하지 않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자기가 할 테니 아빠는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영어 숙제를 완전히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다. 딸도 조금은 도와달라고 했다. 이제부터 계속 혼자 할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딸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빠가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는 말까지다.
그래도 지금은 딸이 영어학원 숙제를 하는 동안 내가 바로 옆 의자에 붙어 앉지 않는다. 소파에 기대 있거나 식탁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연다. 그렇다고 갑자기 드라마를 보거나 유튜브를 켜지는 않았다. 그동안 밀린 아이 사진을 정리하거나 컴퓨터로 하던 작업을 조금 한다.
가끔 고개를 들면 딸은 자기 숙제를 하고 있고, 나는 아이 사진을 정리하고 있다. 자유가 생겨서 정말 좋기는 했는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좀 이상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나씩 아이와의 연결고리가 끊기는 것일까. 숙제를 봐주는 시간이 힘들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그 시간도 결국 딸과 내가 매일 붙어 있던 시간이었다.
아직은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그 조금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지는 불러줄 때 최선을 다해주고 싶다. 오늘도 딸이 숙제하는 동안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아이 사진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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