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날 일부러 멀리 앉았습니다.딸 바로 옆에 앉으면 제가 또 끼어들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제 얼굴을 보면 대답을 대신 해달라는 눈빛을 보낼 것 같았고, 저는 그 눈빛을 못 이기고 또 도와줄 것 같았습니다.그래서 다른 테이블에 앉았습니다.부경대 근처 영어카페였습니다. 일반 카페처럼 보였지만, 안쪽에서는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커피 머신 소리, 컵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낯선 영어 억양이 섞여 있었습니다.딸은 처음부터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많이 쑥스러워했습니다. 빨대 포장지를 만지고, 컵 뚜껑을 보고, 의자에 앉은 자세를 몇 번 바꿨습니다. 미국 교환학생 언니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다가 다시 힐끗 봤습니다.그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저는 계속 계산하고 있었..
A4 한 장을 앞에 두자 아이 손이 멈췄습니다. 연필을 쥔 채로 한참 동안 종이만 내려다봤습니다. 빈 A4 한 장이 일곱 살에게는 생각보다 큰 벽이었습니다. 단어를 몰라서 멈춘 것처럼 보였지만, 옆에서 보니 조금 달랐습니다. 아이는 아직 ‘무엇을 써야 할지’를 고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뭐 했는지 써봐’라는 말은, 하루 전체를 한꺼번에 떠올리라는 주문이라 오히려 더 막막했습니다. 영어 문장을 만들기 전에, 하루 중에서 쓸 만한 장면을 먼저 작게 잘라야 했던 겁니다.그날은 A4 옆에 포스트잇 네 장을 붙였습니다. 놀이터, 친구, 간식, 집에 오는 길. 글자만 적으면 그 칸도 또 다른 빈 종이가 될 것 같아, 칸마다 작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놀이터 칸에는 미끄럼틀을, 친구 칸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
딸이 영어 영상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한 편이 끝나기도 전에 리모컨을 들고 다음 화면을 눌렀다.노래가 후렴으로 가기도 전에 다음 썸네일을 찾았다. 조금 보다 또 넘겼다.그날 내가 처음 눈여겨본 것은 영어가 아니었다.딸 손가락이었다.그동안 나는 영어 영상을 몇 분 봤는지에 더 신경을 썼다. 오래 보면 너무 오래 본 것 같았고, 영어로 보고 있으면 그래도 영어를 듣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그런데 딸이 계속 다음 화면을 찾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30분을 봤다는 숫자보다 한 영상에 얼마나 머물렀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한 편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영상을 찾고 있었다딸 손에는 리모컨이 있었다.한 영상을 보고 있는데도 손가락은 이미 다음 화면을 준비하고 있었다.나는 그날 리모컨을 뺏지 않았다.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