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유치원에 보내면 아이가 단어를 제법 가져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서 “그거 무슨 뜻이야?” 하고 물으면 멀뚱한 경우가 많아요. 분명 원에서 배웠고 발음도 하는데 뜻이 몸에 안 붙은 겁니다. 저도 한동안은 단어장을 다시 펴서 확인하는 식으로만 복습을 시켰는데, 효과가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방향이 바뀐 건 비 오던 어느 저녁이었어요. 현관에 들어선 딸이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더니 “It's raining again”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낮게 “The floor is wet”이라고 붙이자, 딸은 발끝을 들고 젖은 타일을 피해 걸었습니다. wet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어요. 눈앞에 젖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그 저녁 이후로 집에서 단어를 살리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오늘은 그 방법을..
며칠 전부터 딸은 인형들을 작은 의자에 줄지어 앉히고 같은 말을 합니다. “Please sit down.” 표정이 제법 진지해요. 누가 가르친 적도, 제가 먼저 영어를 꺼낸 적도 없었습니다. 처음엔 어디서 나온 말인가 싶었는데, 거슬러 올라가 보니 출발점이 하나 있었어요. 비행 다녀온 엄마 가방에서 나온 안전카드 한 장이었습니다.벨트를 채우던 그날의 손그날 딸이 캐리어 옆 파우치에서 꺼낸 건 기내 안전카드였습니다. 벨트 그림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어요. “Seat belt?” 제가 낮게 “Fasten your seat belt”라고 하자, 딸은 단어 뜻을 묻는 대신 의자에 앉아 허리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벨트를 채우는 흉내였어요.“fasten은 매다라는 뜻이야” 같은 설명은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현관 앞에 택배상자 세 개가 쌓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씻기 전이었고, 저는 박스를 접어야 했습니다. 영어를 하려고 만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박스가 많았습니다.아이 손에는 얇은 영어 그림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제가 읽자고 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낮에 읽다 만 탈것 그림책이었고, 아이가 종이가방 안에 넣어 들고 나왔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습니다. 그 순간 “그럼 내려가서 한 번 읽어볼까?”라고 말하면 바로 숙제가 될 것 같았습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는 거울을 봤습니다. 책은 종이가방 안에 반쯤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박스를 발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영어는 한마디도 안 나왔습니다.책을 펼치기 전에 나온 말지하 1층 분리수거장 앞에서 박스를 접는데..
빨래바구니를 바닥에 엎어놓고 딸과 양말을 나누던 평범한 저녁이었습니다. 책도, 패드도, "이거 영어로 뭐게?" 같은 퀴즈도 없었어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짝을 맞추는 중이었습니다. 딸이 분홍 양말 한 짝을 들고 짝을 찾다가, 옆에 파란 줄무늬 양말을 놓더니 작게 물었습니다. "Different sock?" 색이 다르니 아이 눈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한국말 '다른'이 영어에선 한 단어로 안 끝난다는 게 새삼 보였습니다.그때 우리가 하던 일은 색을 고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짝을 맞추는 일이었죠. 그래서 분홍 양말의 진짜 짝을 찾아 옆에 놓고 짧게 말해줬어요. "This is the other sock." 딸은 두 짝을 나란히 두고 보더니, 같은 색에 같은 무늬인 걸 확인하고..
영어유치원 가방에서 접힌 프린트 한 장이 나왔다.숙제장인 줄 알았는데 얇은 영어 기사였다. 글자는 꽤 많았고 사진은 한쪽에 작게 들어가 있었다.나는 프린트를 보자마자 글자부터 봤다.이 정도 단어를 아는지, 문장을 읽을 수 있는지, 내용을 이해하는지가 궁금했다.딸은 내가 보고 있는 곳을 보지 않았다.사진부터 봤다.사진 속에는 길 위에 남은 흔적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발자국 같기도 했고 무언가 지나간 자국 같기도 했다.딸은 사진 한쪽을 손가락으로 짚고 한참 보고 있었다.그러더니 말했다.“Maybe it is lost.”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다른 생각부터 했다.문장이 맞나.it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기사 내용을 이해해서 한 말인가.lost는 어디서 배웠을까.딸은 사진을 보고 한 문장을 꺼냈는데, 나는 ..
AI보다 먼저 나온 아이의 안내 방송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집에 노란 우산 하나가 현관에 세워져 있었고, 딸은 그걸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우산을 펴지도 않았습니다. 손잡이만 잡고 서 있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바꿨습니다.“This way, please.”처음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숙제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영어책을 펼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안내원처럼 말한 겁니다.저는 그 순간 AI 앱을 켤까 말까 잠깐 고민했습니다. 요즘은 역할놀이 문장도 바로 뽑아주고, 아이 수준에 맞게 대화도 이어줍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바로 켜고 싶지 않았습니다.이미 아이가 먼저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제가 먼저 AI에게 “영어 역할놀이 문장 만들어줘”라고 시킨 게 아니라,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