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유치원에 보내는 집이라면 단어시험을 한 번쯤 겪습니다. 아이가 100점을 받아 오면 안심이 되고, 몇 개 틀려 오면 마음이 쓰입니다. 그런데 몇 해 지내며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시험을 다 맞았다고 그 단어를 제대로 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시험은 그날 그 목록을 기억했는지 확인하는 도구입니다. 다 맞혀도 며칠 뒤 다시 물으면 흐릿해지는 단어가 있고, 틀렸어도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면 또렷해지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점수 자체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대신 단어를 다루는 방식을 몇 가지로 정해 두었습니다.첫째, 아침에는 힘을 뺍니다. 등원 전에 단어를 확인하긴 하지만 다 맞히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아침밥을 먹이면서 단어 스무 개를 100% 다 시키면 아이가 체합니다...
우리 집은 보통 집과 조금 다릅니다. 흔히 아이는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데, 우리 딸은 아빠인 저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어요. 아내가 승무원이라 며칠씩 비행을 나가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가 거의 보통 집 엄마 역할까지 하고 있습니다. 밥 먹이고, 씻기고, 영어유치원 숙제를 챙기고, 재우는 일이 대부분 제 몫이에요. 원 준비물을 챙기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까지 거의 제가 합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제는 이게 우리 집의 보통이 됐습니다.아내는 그게 늘 마음에 걸리나 봅니다. 다른 집과 달리 딸이 엄마 얼굴을 며칠씩 못 보고, 외국으로 비행을 나가 있는 동안 서로 또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그 미안함을 아내는 가방으로 채웁니다. 비행을 갈 때마다 딸을 위한 선물을, 작든 크든 꼭 하나는 ..
우리 딸은 먹는 걸 참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사탕이나 젤리 같은 작은 군것질거리를 제일 반겨요. 다른 건 몰라도 공부 시간에 간식 하나 까먹는 그 순간만큼은, 아이 얼굴에 작은 행복이 번지는 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 집에서 간식은 절반쯤 미끼였습니다. “이거 다 읽으면 하나 더 먹자” 하는 식으로, 숙제를 넘기는 데 쓰는 도구에 가까웠어요. 그날도 책상 옆에 멘토스 몇 알이 올라와 있었고, 저는 그게 그냥 오늘치 숙제를 굴러가게 할 윤활유라고만 생각했습니다.그런데 리딩북을 펴려는데, 딸이 사탕을 입에 넣기 전에 손바닥에 알을 쭉 펼쳐 놓고 저를 불렀습니다.“이거 봐봐, 아빠.”색깔이 알록달록한 레인보우 멘토스였어요. 영어유치원 선생님한테 선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끊지 말고 다 쏟아내길..
나도 글을 써야 한다고 하면 한참 멈춰 있을 때가 있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연필을 잡거나 키보드 앞에 앉아도 첫 글자가 잘 안 나온다. 주제는 정해져 있는데 시작 문장이 막힌다. 머릿속에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종이 위로 내려오지 않는다.그럴 때 아주 살짝 이런 생각이 든다.아,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이 이런 건가.작곡가나 작사가, 작가들이 말하는 그 큰 고통을 내가 다 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첫 줄을 꺼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건 알겠다. 어른인 나도 그런데, 이걸 7살 아이에게 시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영어로 일기든 스토리든 적어보라고 한다.아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막막할까.한국어로도 이야기를 쓰라면 쉽지 않은데, 영어로 쓰라니.선생님은 공책에 적을 수 있는 만큼 적..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에 나들이를 가면 딸은 놀이터부터 찾습니다. 바다 쪽 바람이 차가운 날에도, 한여름처럼 땀이 나는 날에도 놀이기구 앞에서는 금방 뛰기 시작합니다. 공부와 숙제 사이에 눌려 있던 몸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탁 풀리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낯선 친구가 가까이 오면 아이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집에서는 말도 많고 장난도 많은데, 외국인 아이와 마주치면 입이 작아집니다. 영어 단어보다 첫마디를 어디서 어떻게 꺼내야 할지가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마린시티 놀이터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건 외국인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관광지에서 잠깐 스쳐 가는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와 아이들이 보입니다. 딸에게 그 장면은 영어 교재 속 상황이 아니라 바로 옆..
아이 운동화 앞코가 흰 선 밖으로 반쯤 나가 있었습니다.아파트 후문 쪽,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오른쪽에서 우회전하려는 차 한 대가 천천히 굴러오고 있었고, 신호등은 곧 바뀔 듯했습니다. 아이는 이미 건널 생각으로 몸이 앞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습니다.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세게 움켜쥔 건 아닌데, 오른쪽에서 굴러오는 차를 보자 손바닥 안쪽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아이는 신호등을 보고 있었고, 저는 차바퀴를 보고 있었습니다. 차가 완전히 멈춘 건지, 아직 굴러오는 중인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 몇 초가 길었습니다.“뒤로.”말이 먼저 정리된 게 아니라, 한국말이 그냥 튀어나왔습니다. 아이가 저를 봤습니다.그리고 바로 짧게 붙였습니다.“Behind the curb.”흰 선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