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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이가 쉬고 싶다고 하더니 영어책을 열 권 넘게 꺼내 와 읽었습니다. 쉰다면서 책을 펴는 겁니다. 처음엔 그림만 보나 싶었는데 들여다보니 제법 두꺼운, 거의 영어 소설에 가까운 책이었습니다. 대견하다가도 문득 다른 장면 하나가 겹쳐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 같은 아이가 한글책 한 줄 앞에서 더듬거리다 결국 저에게 책을 밀어 놓으며 읽어 달라고 하던 모습입니다.
영어책은 쉬는 시간에도 열 권씩 넘기는 아이가 정작 한글책은 그렇게 버거워합니다. 모국어가 한국어인데 순서가 뒤바뀐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마음이 쓰였습니다. 이러다 한국어가 뒤처지는 건 아닐까, 내가 영어에만 너무 기울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아마 영어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라면 한 번쯤 해봤을 고민일 겁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조금 오래 들여다보고 나니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영어책은 빠른데 한글책은 느려도 괜찮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아이가 한글책을 못 읽게 될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 아이는 이미 책을 읽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영어책으로 이미 독서 습관을,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힘을 길렀습니다. 그 힘은 한글책이라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글자만 다를 뿐 책을 즐기는 마음은 이미 아이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영어책도 처음에는 지독히 더뎠습니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 한참이 걸려서 이게 될까 싶어 애가 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열 권씩 꺼내 읽는 아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느렸습니다. 그런데 그 느린 시간을 지나고 나니 어느새 술술 읽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한 번 겪어봤기 때문에 저는 한글책도 똑같이 될 거라는 걸 압니다. 지금은 그저 속도가 붙기를 기다리는 시간일 뿐입니다. 처음 영어책을 뗐을 때 품었던 그 지나가는 조바심과 똑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혼자 책을 읽기까지의 기록에 적어 두었습니다.
아이는 느린 한글책 읽기를 답답해했습니다
사실 한글책 속도보다 제 마음을 더 건드리는 건 다른 지점입니다. 아이가 이제 제법 컸습니다. 어린아이지만 나름의 생각이 있고, 자기가 영어를 꽤 한다는 것도 영어책을 잘 읽는다는 것도 스스로 압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더딘 한글책이 답답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몇 줄 읽다 말고 저에게 책을 넘기며 읽어 달라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잘하는 걸 티 내다가 혹시 친구들 사이에서 겉돌면 어쩌나, 겸손하라 일러줘도 일곱 살이 어떻게 겸손하겠나 싶어 혼자 앞서가기도 합니다. 영어권 학교에 갈 것도 아닌데 참 별생각을 다 합니다. 그래도 이런 마음이 드는 걸 보면 결국 저는 아이가 어디서든 잘 지내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영어책은 혼자, 한글책은 제가 읽어줍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하는 일은 단순합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책을 최선을 다해 읽어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한글책을 편하게 집어 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영어책은 이제 혼자 읽으니 제 목소리는 한글책 쪽으로 옮겨 왔습니다. 과학책이든 또래 아이들 이야기가 담긴 책이든 아이가 골라 오면 저는 밤마다 그 옆에서 읽어줍니다.
입이 마를 때까지 읽어줄 생각입니다. 밤마다 아이 옆에서 목소리를 내어 읽어주던 그 시간이 영어책에서 그랬듯 한글책에서도 결국 아이를 스스로 읽게 만들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영어책을 밤마다 읽어주며 제가 두 눈으로 확인한 그 변화는 책 안 읽던 아빠가 밤마다 읽어준 기록에 자세히 남겨 두었습니다.
한글책 읽기, 서두르지 않으려 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쑥거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괜찮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이보다 더한 고비도 함께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쪽쪽이를 뗄 때도 영어책을 처음 펼 때도, 그때마다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결국 다 지나갔습니다. 지금 한글책이 느린 이 시간도 아마 그렇게 지나갈 겁니다. 열 권씩 영어책을 꺼내 읽듯 언젠가 한글책도 그렇게 될 테니, 저는 서두르지 않고 오늘 밤도 아이 옆에서 한글책을 펼칩니다.
※ 이 글은 일곱 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록입니다. 아이마다 언어가 자라는 속도와 순서는 다를 수 있으니 참고로만 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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