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편의점만 보이면 딸 얼굴이 먼저 바뀝니다. 멀리서 간판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걸음이 살짝 느려지고, 입꼬리가 먼저 올라갑니다. 엄마가 외국에서 온갖 맛있는 과자를 사 와도 이상하게 편의점 앞에서는 또 다른 표정이 나옵니다.과자가 특별히 더 맛있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는 그 안에 들어가서 직접 고르는 시간이 더 큰 재미처럼 보였습니다. 작은 봉지들이 줄지어 있고, 색깔이 다르고, 손에 들었다가 내려놓을 수 있고, 다시 고를 수 있는 공간. 어른에게는 그냥 편의점이지만 아이에게는 작은 가게 하나가 통째로 열리는 곳이었습니다.그날도 딸은 과자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빨리 하나 고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녁 시간도 밀려 있었고, 집에 가서 씻기고 숙제도 봐야..
영어책 한 권을 다 읽은 딸에게, 책을 덮자마자 제일 쉬운 질문을 던졌습니다.“What was the funniest part?”딸은 바로 고르지 못했습니다. 눈은 책 표지에 머물렀고, 손은 책 모서리만 만지작거렸습니다. 책장은 끝까지 넘어갔는데, 정작 웃겼던 데를 자기 말로 꺼내는 자리까지는 아직 닿지 못한 얼굴이었습니다.사실 어려운 책을 덮자마자 “제일 웃긴 데가 어디였어?”에 바로 답하는 건 아이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른도 낯선 책을 막 읽고 요점을 말해보라고 하면 한 박자 쉬게 되니까요. 딸의 침묵을 “못한다”는 신호로 읽은 건 제 조급함이었습니다.그날 제 눈은 권수에 가 있었습니다. 한 권 다 읽었다는 표시만 보고 마음을 놓은 겁니다. 그런데 딸에게 필요했던 건 한 권을 더 넘기는 게 아니..
아침에 입고 간 바지가 비닐봉지에 담겨 가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옆에는 갈아입은 여벌옷과, 접힌 별 모양 칭찬표가 같이 있었습니다. 비닐봉지는 아이가 당황했을 시간을, 접힌 칭찬표는 선생님이 그 시간을 조용히 덮어주신 흔적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묻고 싶은 게 먼저 줄을 섰습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친구들이 봤어, 많이 창피했어, 선생님께는 뭐라고 했어. 그런데 아이는 칭찬표보다 제 얼굴을 먼저 봤습니다.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부터 살피는 눈이었습니다. 그 눈빛을 보고 줄 서 있던 질문을 그냥 삼켰습니다.영어유치원에서는 화장실 가는 것도 “Can I go to the bathroom?” 같은 문장으로 말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이는 그 문장을 알고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몇 번 해본 말..
친구는 독서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그런데 친구가 집에 온 뒤, 딸의 영어책은 조금 다른 물건이 됐습니다. 혼자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 됐습니다.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딸 입에서 한 친구 이름이 자주 나왔습니다. 밥 먹다가도 나왔고, 장난감을 만지다가도 나왔습니다. 그냥 같은 반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 집까지 이어지고 싶은 이름처럼 들렸습니다.스케줄을 맞춰 그 친구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책 읽히려고 부른 건 아니었습니다. 놀고, 간식 먹고, 다시 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친구가 오기 전부터 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장난감보다 책 바구니를 먼저 봤습니다. 평소 읽던 영어책을 아무렇게나 꺼낸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씩 넘겨보더니 따로 빼놓기 시작했습니다.웃긴 장면이 있는 책은 ..
영어유치원을 쉬게 된 아침아침부터 아이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열이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축 처져 있었다. 고민 끝에 영어유치원에 결석 연락을 했다. 하루 정도 쉰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쪽은 편하지 않았다.'진도를 놓치면 어떡하지?''다른 아이들은 수업을 듣고 있을 텐데.'부모라면 한 번쯤 해봤을 생각이었다.처음에는 집에서 책을 읽어주거나 교육 영상을 잠깐 보여주며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는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엄마, 코끼리는 왜 코가 길어?"그 질문 하나가 그날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책 대신 동물 이야기를 했다 "그럼 기린 목은 왜 길어?" "펭귄은 왜 못 날아?" "하마는 왜 입을 그렇게 크게 벌려?"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
영어유치원 상담표를 받아오면 이상하게 좋은 말보다 애매한 말이 먼저 보입니다. 잘하고 있다는 문장은 잠깐 기분이 좋고, 조금 더 지켜보자는 문장은 오래 남습니다. 저는 상담표를 펼쳐놓고도 아이 얼굴보다 종이 위 문장을 먼저 보고 있었습니다.그날도 그랬습니다. 가방에서 상담표를 꺼냈고, 아이는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적어준 문장을 읽었습니다. 발표, 참여, 친구 관계, 수업 태도. 단어는 다 익숙한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유치원에서는 잘한다고 적혀 있는데 집에서는 말이 줄어드는 날이 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는 발표를 한다는데 아빠 앞에서는 “몰라”로 끝나는 날도 있습니다. 상담표를 읽는 순간 저는 자꾸 둘 중 하나를 고르려고 했습니다. 유치원 모습이 진짜인지, 집 모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