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백에서 그 책을 처음 꺼냈을 때, 솔직히 너무 쉬워 보였습니다. 표지에 동물 한 마리, 안쪽에는 “I see a dog.” 한 줄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걸로 영어가 늘까 싶어서, 저는 그 자리에서 욕심을 부렸습니다. 쉬운 책이니 여러 번 반복하면 입에 붙겠지. 같은 책을 다시 펼치게 했고, “한 번만 더, 또박또박 읽어보자”고 했습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됐습니다.아이 얼굴은 두 번째 페이지에서 굳었습니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쉬운 책을 암기 숙제로 바꿔놓은 탓이었습니다. 처음엔 신나서 “I see a dog!” 하고 읽던 아이가, 같은 문장을 세 번째 읽을 때는 입을 거의 안 움직였습니다. 가장 쉬운 책을 가장 부담스러운 책으로 만든 사람은 결국 저였습니다...
플랩북을 꺼내면 저는 늘 먼저 손이 갔습니다. 접힌 부분을 살짝 들어 올리고, 아이가 보기 좋게 펼쳐주고, 안에 뭐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책을 같이 읽는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면 제가 책을 대신 열어주고 있었던 날이 많았습니다.그날도 딸은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씻고 나온 뒤라 머리는 아직 조금 젖어 있었고, 잠옷 소매는 손등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저는 책장에서 얇은 플랩북 하나를 꺼내 아이 무릎 위에 올려뒀습니다. 책은 가벼웠지만 아이 손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표지를 한 번 쓸었습니다. 모서리를 만졌습니다. 접힌 부분 끝에 손가락을 대고도 바로 열지 않았습니다.예전 같으면 제가 바로 말했을 겁니다.여기 열어봐. 안에 뭐 있을까. 이건 무슨 그림 같아.그 말들이 나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
수건은 원래 머리 말리려고 꺼낸 거였습니다. 영어를 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었고, 책 옆에 둔 교구도 아니었습니다. 씻고 나온 딸 머리에서 물기가 떨어져서 그냥 수건 하나를 건넸습니다.그런데 딸은 머리를 닦지 않았습니다. 수건 끝을 잡고 거실 바닥에 앉더니 손목으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이었습니다. 소파 앞 러그 위에서 수건이 작게 돌았고, 딸은 그 움직임을 보면서 몸을 옆으로 기울였습니다.저는 그때도 영어를 붙이고 싶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round”를 말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고 있으니까 round, 다시 돌리니까 again, 멈추니까 stop. 머릿속에서는 이미 영어 표현 몇 개가 줄을 섰습니다.그런데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다.이상하게 그날은 단어를 먼저 꺼내면 놀이가..
어느 주부터 딸은 리딩북을 가방에서 꺼내도 책상 위에 바로 펼치지 않았습니다. 손끝으로 표지만 슬쩍 밀어두고 물을 마시러 가거나, 연필을 괜히 깎았습니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주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어려워서 피하는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책이 자기 쪽으로 당겨오지 않는 얼굴에 가까웠습니다.영어유치원을 보내고 나서 한동안은 원 수업과 리딩북만 챙기면 충분해 보였습니다. 수업도 있고 숙제 책도 나오니, 집에서는 그걸 확인만 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고 나니, 집 책장에 정작 딸 것이 한 권도 없다는 게 보였습니다. 전부 원에서 내려온 책, 해야 할 책뿐이었습니다.책이 자기 쪽으로 안 당겨오는 얼굴아이의 읽기 의욕은 책의 난이도보다 흥미와 선택에 더 붙어 있다고 합니다(Rea..
식탁 위 저울은 0g에서 멈춰 있었습니다. 작은 그릇 하나가 올라가 있었고, 딸은 숟가락을 들고도 한참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스 병을 보고, 숫자를 보고, 다시 제 얼굴을 봤습니다.그날 저는 영어를 시키려고 저울을 꺼낸 게 아니었습니다. 저녁 반찬 옆에 소스를 조금 덜어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숫자가 바뀌는 걸 오래 보고 있었습니다. 숟가락 끝에 소스가 매달려 있었고, 저는 그 장면에 영어를 붙이고 싶어졌습니다.more, little, stop.머릿속에서는 이미 짧은 단어들이 줄을 섰습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바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0g 앞에서 말이 멈춘 시간딸은 소스를 뜨기 전에 한참을 멈췄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있었지만 손목이 움직이지 않..
저녁마다 같은 장면이 반복됐습니다. 책장 앞에 선 딸은 새로 사둔 두꺼운 영어책 대신, 예전에 몇 번이나 읽었던 얇은 책을 먼저 꺼냈습니다. 표지가 닳은 동물 그림책이었습니다. 저는 그 옆에 있던 한 단계 높은 책을 권하고 싶었지만, 그날은 입을 다물고 지켜봤습니다.딸은 얇은 책을 펴더니 작은 벌레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Tiny bug." 문장이라기보다 혼잣말에 가까운 한마디였지만, 그 순간 아이가 책을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는 게 보였습니다.어려운 책을 펼친 날의 딸은 달랐습니다. 첫 페이지에서 목소리가 작아졌고, 페이지는 넘기는데 얼굴에서 장면에 대한 반응이 사라졌습니다. 다 읽고 "어떤 장면이 기억나?" 하고 물으면 그림 한 장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조금만 더 읽어보자" 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