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쯤 책상 앞에 앉으면, 나는 숙제장보다 아이 얼굴을 더 자주 본다.회사에서 돌아와 최대한 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고, 물컵을 올려놓고, 영어유치원 가방을 열면 거의 그 시간이다. 아이는 이미 하루를 다 쓰고 왔고, 나도 하루를 다 쓰고 왔다. 그런데 그때부터 우리 집의 두 번째 하루가 시작된다.영어유치원 숙제.리딩북, 워크북, 라이팅, 단어, 발표 준비가 한꺼번에 책상 위로 올라온다. 엄마가 비행 스케줄로 집을 비우는 날에는 내가 거의 전부 맡는다. 씻기고, 앉히고, 달래고, 읽히고, 쓰게 하고, 다시 웃겨야 한다.나는 밤 10시를 넘기지 않으려고 한다. 10시도 늦다. 7살 아이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더 일찍 재우고 싶은 마음이 매일 걸린다. 그런데 현실은 늘 반듯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
영어유치원을 보내다 보면 한 번쯤 갈림길에 섭니다. 패드로 영어를 시킬까, 종이책을 쥐여줄까. 저는 둘 중 하나를 먼저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책입니다. 영상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순서가 있다고 믿습니다. 기본은 책이고, 영상은 그다음입니다. 왜 책이 먼저인가이유는 단순합니다. 책은 읽다가 멈추게 합니다. 한 문장을 읽고 잠깐 생각하고, 모르는 데서 앞으로 다시 돌아가고, 그림과 글자 사이를 오갑니다. 그 사이에 아이 머리가 돌아갑니다. 영상은 그게 잘 안 됩니다. 소리와 화면이 알아서 흘러가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쉽습니다. 유튜브 숏츠를 떠올리면 분명합니다. 자극은 세고 중독성도 있지만, 남는 건 스쳐 지나간 정보 한 조각인 경우가 많습니다.여러 읽기매체 연구에서도 어린아이는 ..
“이거 쉬운데?”전날 봤던 단어가 워크북에 다시 나오거나, 이미 여러 번 읽은 문장에서 딸이 멈추면 제가 자주 꺼냈던 말입니다.저는 가볍게 한 말이었습니다. 한 번 했던 내용이니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딸은 문제를 다시 보기보다 먼저 제 얼굴을 봤습니다.“아까 했잖아.”같은 단어를 또 틀리거나, 조금 전까지 잘하던 스피킹 문장이 다시 꼬일 때는 이 말도 따라 나왔습니다. 아이의 영어를 고쳐주려고 앉았는데, 어느 날부터는 제 첫마디가 숙제 분위기를 먼저 굳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거 쉬운데?”라고 하자 딸은 제 얼굴을 봤습니다영어유치원 숙제는 어른 눈에 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짧은 단어와 문장, 간단한 그림을 보면 저도 모르게 난이도부터 정했습니다.아이..
나도 글을 써야 한다고 하면 한참 멈춰 있을 때가 있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연필을 잡거나 키보드 앞에 앉아도 첫 글자가 잘 안 나온다. 주제는 정해져 있는데 시작 문장이 막힌다. 머릿속에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종이 위로 내려오지 않는다.그럴 때 아주 살짝 이런 생각이 든다.아,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이 이런 건가.작곡가나 작사가, 작가들이 말하는 그 큰 고통을 내가 다 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첫 줄을 꺼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건 알겠다. 어른인 나도 그런데, 이걸 7살 아이에게 시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영어로 일기든 스토리든 적어보라고 한다.아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막막할까.한국어로도 이야기를 쓰라면 쉽지 않은데, 영어로 쓰라니.선생님은 공책에 적을 수 있는 만큼 적..
영어책에 붙은 숫자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딸 정도면 또래에서 중상은 되겠지 싶었고, 솔직히 고작 일곱 살 아이가 테스트를 잘 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그런데 주변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음이 자꾸 흔들렸습니다. 학원에서도, 동네 부모들 사이에서도 아이 점수 이야기가 오갔고, 어디는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 나와야 받아준다는 말까지 들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래서 우리 아이는 지금 어디쯤이지?" 하는 궁금증이 슬그머니 올라왔습니다. 결국 테스트를 한번 보기로 했습니다.결과를 받고는 조금 허탈했습니다. 생각보다 점수가 낮게 나왔거든요. 잘 본들 의미 있겠냐던 마음이 무색하게, 막상 숫자가 기대 아래로 찍히니 마음이 쓰였습니다.선생님이 짚은 건 점수가 아..
“엄마 언제 와?”아내가 장거리 비행을 가면 딸은 며칠씩 엄마를 보지 못했습니다. 길면 일주일 가까이 부산 집에는 엄마 자리가 비었습니다.그날도 영어유치원 숙제를 펴놓은 딸이 엄마부터 찾았습니다. 저는 숙제를 더 하자고 바로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스피킹 대본을 그대로 접을 수도 없었습니다.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엄마 오면 이거 보여주자.”엄마가 언제 오는지 다시 설명하는 대신, 엄마에게 보여줄 문장 하나를 같이 준비해보기로 했습니다. 엄마 없는 날에는 영어유치원 가방을 작게 열었습니다아내는 승무원이라 비행 일정에 따라 며칠씩 서울 쪽 숙소에서 지냈습니다. 저는 식자재영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딸을 씻기고 밥을 먹인 뒤 영어유치원 가방을 열었습니다.가방 안에는 리딩북과 워크북, 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