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훨씬 편한 우리 딸이 차 안에서 급박하게 "쉬마려"라고 한국말로 했다. 오마이갓. 그때는 차에 쉬하면 어쩌나 싶어서 나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영어책을 한글책보다 훨씬 많이 읽고, 영어가 확실히 더 술술 나오는 아이가 왜 이런 급박한 순간에는 우리말이 먼저 나왔을까. 그게 궁금해서 딸한테 직접 물어봤고, 답을 듣고 나서 내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차 안에서 터진 '쉬마려'대체공휴일이었다. 아침에 뭔가 짭짤한 걸 먹었는지 딸이 물을 엄청 마셨다.할머니 집에 가기로 했고 차로 10분에서 15분 거리였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화장실 갔다 가자고 했는데 괜찮단다. 참을 수 있단다. 이럴 때 아이 말은 믿으면 안 되는데 그날은 그냥 출발했다.아파트에서 차를 빼서 ..
딸을 안아줬더니 눈물이 터졌다. 아까 혼날 때 이미 실컷 울었는데, 내 품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무너졌다. 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아내 지인 가족을 만났고, 우리 딸은 끝까지 제대로 인사를 안 했다. 집에 와서 아내한테 단단히 혼났고, 나는 이번만큼은 아내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빠져 있었다. 3년 동안 영어는 그렇게 챙겼으면서 인사는 한 번도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다는 걸 그날 알았다.엘리베이터 인사, 뒤로 숨은 날엘리베이터에 아내가 아는 가족이 같이 탔다. 부부와 아이 하나였는데 그 아이가 우리 딸보다 동생이었다.그 동생이 인사를 너무 잘했다. 우리 딸한테도 누나 안녕, 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거다. 그런데 우리 딸은 그냥 멀뚱멀뚱 서 있었다.아내가 아이 머리를 만지면서 인사를 시켰다. 동생한테도 인사해줘, ..
그날 나는 딸한테 영어책 좀 그만 읽으라고 했다. 하루 종일 그 말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딸이 나를 앉혀놓고 책을 펼쳤다. 자기가 얼마나 재밌게 읽고 있는지 알려주겠다면서. 말리러 갔다가 앉아서 배우고 나온 셈이다. 초등 입학을 앞둔 마지막 주말이었고, 하루 일과를 좀 나눠보려던 계획은 아침부터 어그러졌다. 아내가 카톡으로 잡아준 계획도 같이 날아갔다. 3년째 영어책을 읽히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영유 때는 남는 시간도 영어였다영유를 다닐 때는 영어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남는 시간도 영어로 채웠다. 그게 당연했다. 하루를 통으로 영어에 쓰는 게 그 시절의 방식이었으니까. 나도 그 방식에 맞춰서 3년을 살았다. 저녁에 뭘 시킬지 고민할 때 선택지가 영어 안에 다 있었다.그런데 초등학생이 ..
사범님이 알레, 하면 딸이 몸을 먼저 움직인다. 뜨슈, 마르쉐, 팡트도 마찬가지다. 그 소리가 나면 생각하기 전에 자세가 잡힌다. 나는 그걸 옆에서 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우리 딸이 영어를 배운 방식이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뜻을 먼저 배우고 쓴 게 아니라, 상황에 맞는 소리를 계속 듣다가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된 것. 딸은 그게 프랑스어라는 것도 모른다. 7월부터 펜싱을 시작했는데 한 달이 좀 넘었다. 그 사이에 딸한테 생긴 변화가 하필 영어 쪽이라는 게 나는 좀 신기했다.펜싱 용어, 뜻 몰라도 몸이 먼저 움직인다펜싱에서 많이 하는 자세가 마르쉐와 팡트다. 시합 중에는 알레와 뜨슈 같은 말이 계속 나온다.나는 그 말뜻을 딸한테 알려주지 않았다. 일부러 안 알려준 것도 아니고 그냥 알려줄..
"나중에 의사가 될 건데, 나는 피부과 의사라서 다리는 다른 의사 선생님 소개시켜줄게."그날 시크릿쥬쥬 키즈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곱 살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 정말 오랜만에 간 키즈카페였다. 우리 딸은 여자아이답게 공주를 정말 좋아해서 그날도 신이 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딸은 처음 본 동생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혼자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그 걱정은 하나도 필요가 없었다. 그날 엄지척을 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딸이었다. 시크릿쥬쥬 키즈카페, 아빠의 걱정키즈카페는 은근히 비싸다. 입장료 내고 안에서 간식까지 사 먹으면 돈이 제법 나온다. 그럴 때면 나는 자동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돈이면 원어민 수업을 한 번 더 알아볼까, 학원을 하나 더 볼까. 놀러 와서까지 ..
그날 딸이 영어로 혼잣말을 했다. 화가 난 채로. 내용은 못 알아들었다. 무슨 영상에서 본 표현인지 모르겠는데, 누가 봐도 화내면서 중얼거리는 영어였다. 아내가 오랜만에 비행을 마치고 부산에 와 있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나도 더웠고 회사에서 실적으로 한소리 들었고, 딸은 딸대로 숙제와 시험 때문에 혼이 났다. 집 안에 쏴한 기운이 돌았고, 우리 셋은 각자 화가 나 있었다. 아이라고 매일 행복하고 기분 좋게만 보내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날이 아니었다.화난 날, 짜증도 영어로혼잣말은 방 쪽에서 들려왔다. 중얼중얼 이어지는데 한국어가 하나도 안 섞여 있었다. 내가 아내를 쳐다봤다. 어쭈, 이제 짜증도 영어로 내냐. 속으로 그 말이 먼저 나왔다.아내가 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딸 잘못한 걸 바로잡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