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옆 달력에는 영어 일정이 꽤 많이 적혀 있었다.스피치, 리딩북 반납, 단어 확인, 숙제, 학원.내 눈에는 잘 정리된 달력이었다. 빠뜨리지 않고 챙기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딸이 그 달력을 한참 보더니 손가락으로 칸을 하나씩 지나갔다.스피치가 적힌 칸도 아니었다.리딩북 반납일도 아니었다.손가락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토요일 오후에서 멈췄다.딸은 그 빈칸에 하트를 하나 그렸다.그리고 말했다.“여기는 그냥 노는 시간.”나는 그 말을 듣고 달력을 다시 봤다.내가 중요하다고 적어놓은 건 전부 글자가 있었는데, 딸이 가장 먼저 고른 곳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내게는 빈칸이었는데 딸에게는 이미 일정이었다사실 토요일 오후에도 넣어볼 생각을 했던 게 있었다.스피치를 한 번 더 볼 수도 있었고, 리딩북을 읽을 ..
영어유치원 상담을 다녀온 날, 딸은 차 안에서 체험수업 때 들은 영어 노래를 흥얼거렸다.상담도 나쁘지 않았다. 원어민 수업, 리딩 프로그램, 발표 활동, 차량 운행까지 설명을 듣고 나오니 마음이 어느 정도 기울었다.아이도 즐거워 보였다.그런데 집에 돌아와 상담지를 식탁에 놓고, 그 옆에 아내의 비행스케줄표를 펼쳤다.그때부터 영어유치원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상담지에서는 보이지 않던 시간이 비행스케줄표에는 있었다.엄마가 비행으로 집에 없는 날.내가 김해 일정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날.장모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등원 준비부터 하원 뒤 저녁까지 누가 아이 옆에 있을지 바로 정해지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영어유치원을 고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식탁에서는 우리 가족 시간표를 맞추는 일이 돼 있었다.원비를 적다..
호텔 방문 앞에서 카드키가 먹통이 됐다.초록 불이 들어와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딸은 카드키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복도 끝에서 호텔 직원이 걸어왔다.나는 당연히 내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딸이 카드키를 앞으로 내밀더니 먼저 말했다.“It doesn’t work. Can you help us?”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영어유치원 발표회에서 외운 문장도 아니었고 숙제도 아니었다.문이 안 열렸고, 자기는 방에 들어가고 싶었고, 그래서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내가 놀란 건 영어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딸이 문제를 자기 손에 들고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게 더 신기했다.방 번호를 물었는데 내가 먼저 대답할 뻔했다직원은 딸에게 방 번..
수업을 마치고 나온 딸이 차에 탔다.다음 수업 가방을 찾은 것도 아니고 책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물병부터 찾았다.몇 모금 마시고는 뒷좌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나는 바로 수업 이야기를 물었을 것이다.오늘 어땠는지, 다음 일정은 괜찮은지, 뭘 배웠는지.그런데 그날은 백미러로 딸을 한번 보고 그냥 운전했다.정확히 왜 조용했는지는 모른다.피곤했을 수도 있고, 목이 많이 말랐을 수도 있고, 그냥 아무 말도 하기 싫었을 수도 있다.다만 한 가지는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내가 짠 시간표에는 영어, 독서, 사고력, 운동 같은 수업 이름은 빼곡하게 있었는데 그 수업과 수업 사이에 있는 딸의 시간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시간표에는 수업 이름만 있었다나는 그동안 이동시간을 그냥 이동시간이라고 생각했다.어..
호주 공항에서 딸이 내 뒤가 아니라 직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나는 짐과 커피를 들고 있었고, 딸은 자기 작은 가방을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딸은 자기 가방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잠깐 쉴 수 있는 곳도 찾으려고 했다.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생각이 한참 멀리 갔다.이 아이가 언젠가 해외에서 공부해도 되지 않을까.조기유학이라는 단어가 그때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딸이 영어를 잘해서만은 아니었다.내 뒤에 숨어서 내가 해결해주길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궁금한 걸 직원에게 직접 물어보는 모습이 좋았다.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내가 공항에서 본 장면과 내가 내린 판단 사이가 너무 멀었다.공항에서 몇 마디 했는데 나는 미래까지 생각했다공항에서 내가 본 건 짧은 시간이었다.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