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복 카디건 하나가 우리 집 가방에 들어와 있었습니다.딸아이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 안쪽 라벨에 친구 이름이 적혀 있었고, 딸아이는 보자마자 그 이름을 바로 불렀습니다.“아, 이거 친구 거야.”너무 빨랐습니다. 같은 반 친구라서 이름을 아는 건 당연한데, 그 이름이 아이 입에서 너무 쉽게 지나갔습니다. 저는 카디건을 바로 접지 못했습니다.라벨에는 영어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손끝으로 라벨을 잡아당겨 한 번 더 봤습니다. 저는 그 옆에서 잠깐 늦었습니다. 이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게 맞는지, 교실에서는 어떻게 들리는지, 친구는 자기 이름을 어떤 소리로 듣고 있는지. 그런 생각이 라벨 앞에서 잠깐 걸렸습니다.친구 이름을 틀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발음을 검사하려는 것도 아니었고요. 다만 ..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가방에서 생일 초대장이 나오는 날이 있습니다. 반가운 한편, 하필 그날 다른 일정이 있으면 난감해집니다. 못 가는 걸 아이가 친구에게 영어로 어떻게 전하게 할지, 저도 한참 고민했습니다.우리 집은 아내가 승무원이라 집에 오는 날이 들쭉날쭉합니다. 초대장에 적힌 날이 마침 아내가 며칠 만에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친구 생일까지 겹쳐서, 못 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기까지 아이도 저도 며칠이 걸렸습니다. 그날 아이에게 시킨 말을 정리해 둡니다.RSVP가 뭔지부터초대장 아래쪽 작은 글자에 RSVP가 적혀 있습니다. 어려운 약자가 아니라 "올 건지 안 올 건지 알려달라"는 표시입니다. 파티 장소나 시간보다 사실 이 네 글자가 더 중요합니다. 초대한 친구가 ..
지하주차장에서 차 시동을 끄려는 때였다.영어유치원 단톡방에 숙제사진이 올라왔다.리딩북 몇 권.빨간 체크가 찍힌 워크북.가지런히 놓인 숙제장.사진은 조용했는데 내 머릿속은 바로 바빠졌다.우리 아이는 오늘 몇 권 했지.워크북은 어디까지 했지.발표 준비까지 하면 시간이 되나.그때 뒷좌석을 봤다.딸은 아직 가방 지퍼를 잡고 있었다.숙제장을 꺼낸 것도 아니었고, 오늘 리딩북을 몇 권 읽었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나는 다른 집 숙제사진 한 장을 보고 우리 집 저녁부터 계산하고 있었다.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없었던 질문이 생겼다단톡방에 올라온 건 다른 집에서 찍은 숙제사진이었다.그런데 사진을 보자마자 나는 그 집 숙제보다 우리 딸부터 떠올렸다.리딩북을 보면서 우리 아이가 오늘 몇 권 했는지 궁금해졌고, 워크북 ..
영어유치원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나는 상담사 설명을 거의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원비는 얼마인지, 교재비는 따로인지, 차량비는 어떻게 되는지 계속 듣고 계산했다.그런데 옆에 있던 딸은 상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상담실 한쪽에 있던 블록을 가지고 혼자 이것저것 만들고 있었다.한참 설명을 듣다가 딸 쪽을 봤는데 자기가 만든 것을 버스정류장이라고 영어로 표현하고 있었다.누가 영어로 말해보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상담사가 질문한 것도 아니고 내가 영어를 해보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나는 원비를 계산하고 있었고, 딸은 그냥 놀고 있었다.영어유치원에 다닐 사람은 딸인데 나는 어른만 보고 있었다영어유치원 상담을 가면 확인할 게 정말 많다. 나도 마찬가지였다.수업은 어떻게 하는지, 원어민 수업은 얼마나 있는지, 숙..
리딩백에서 그 책을 처음 꺼냈을 때, 솔직히 너무 쉬워 보였습니다. 표지에 동물 한 마리, 안쪽에는 “I see a dog.” 한 줄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걸로 영어가 늘까 싶어서, 저는 그 자리에서 욕심을 부렸습니다. 쉬운 책이니 여러 번 반복하면 입에 붙겠지. 같은 책을 다시 펼치게 했고, “한 번만 더, 또박또박 읽어보자”고 했습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됐습니다.아이 얼굴은 두 번째 페이지에서 굳었습니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쉬운 책을 암기 숙제로 바꿔놓은 탓이었습니다. 처음엔 신나서 “I see a dog!” 하고 읽던 아이가, 같은 문장을 세 번째 읽을 때는 입을 거의 안 움직였습니다. 가장 쉬운 책을 가장 부담스러운 책으로 만든 사람은 결국 저였습니다...
어느 주부터 딸은 리딩북을 가방에서 꺼내도 책상 위에 바로 펼치지 않았습니다. 손끝으로 표지만 슬쩍 밀어두고 물을 마시러 가거나, 연필을 괜히 깎았습니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주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어려워서 피하는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책이 자기 쪽으로 당겨오지 않는 얼굴에 가까웠습니다.영어유치원을 보내고 나서 한동안은 원 수업과 리딩북만 챙기면 충분해 보였습니다. 수업도 있고 숙제 책도 나오니, 집에서는 그걸 확인만 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고 나니, 집 책장에 정작 딸 것이 한 권도 없다는 게 보였습니다. 전부 원에서 내려온 책, 해야 할 책뿐이었습니다.책이 자기 쪽으로 안 당겨오는 얼굴아이의 읽기 의욕은 책의 난이도보다 흥미와 선택에 더 붙어 있다고 합니다(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