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쯤 책상 앞에 앉으면, 나는 숙제장보다 아이 얼굴을 더 자주 본다.회사에서 돌아와 최대한 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고, 물컵을 올려놓고, 영어유치원 가방을 열면 거의 그 시간이다. 아이는 이미 하루를 다 쓰고 왔고, 나도 하루를 다 쓰고 왔다. 그런데 그때부터 우리 집의 두 번째 하루가 시작된다.영어유치원 숙제.리딩북, 워크북, 라이팅, 단어, 발표 준비가 한꺼번에 책상 위로 올라온다. 엄마가 비행 스케줄로 집을 비우는 날에는 내가 거의 전부 맡는다. 씻기고, 앉히고, 달래고, 읽히고, 쓰게 하고, 다시 웃겨야 한다.나는 밤 10시를 넘기지 않으려고 한다. 10시도 늦다. 7살 아이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더 일찍 재우고 싶은 마음이 매일 걸린다. 그런데 현실은 늘 반듯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
“이거 쉬운데?”전날 봤던 단어가 워크북에 다시 나오거나, 이미 여러 번 읽은 문장에서 딸이 멈추면 제가 자주 꺼냈던 말입니다.저는 가볍게 한 말이었습니다. 한 번 했던 내용이니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딸은 문제를 다시 보기보다 먼저 제 얼굴을 봤습니다.“아까 했잖아.”같은 단어를 또 틀리거나, 조금 전까지 잘하던 스피킹 문장이 다시 꼬일 때는 이 말도 따라 나왔습니다. 아이의 영어를 고쳐주려고 앉았는데, 어느 날부터는 제 첫마디가 숙제 분위기를 먼저 굳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거 쉬운데?”라고 하자 딸은 제 얼굴을 봤습니다영어유치원 숙제는 어른 눈에 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짧은 단어와 문장, 간단한 그림을 보면 저도 모르게 난이도부터 정했습니다.아이..
“엄마 언제 와?”아내가 장거리 비행을 가면 딸은 며칠씩 엄마를 보지 못했습니다. 길면 일주일 가까이 부산 집에는 엄마 자리가 비었습니다.그날도 영어유치원 숙제를 펴놓은 딸이 엄마부터 찾았습니다. 저는 숙제를 더 하자고 바로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스피킹 대본을 그대로 접을 수도 없었습니다.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엄마 오면 이거 보여주자.”엄마가 언제 오는지 다시 설명하는 대신, 엄마에게 보여줄 문장 하나를 같이 준비해보기로 했습니다. 엄마 없는 날에는 영어유치원 가방을 작게 열었습니다아내는 승무원이라 비행 일정에 따라 며칠씩 서울 쪽 숙소에서 지냈습니다. 저는 식자재영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딸을 씻기고 밥을 먹인 뒤 영어유치원 가방을 열었습니다.가방 안에는 리딩북과 워크북, 라이..
딸아이 숙제장에 빨간 엑스를 치자 얼굴빛이 바로 어두워졌습니다. 맞으면 동그라미, 틀리면 엑스. 어른에게는 빠르고 깔끔한 채점 방식인데, 아이에게는 그 표시가 문제보다 크게 들어갔습니다. 다시 읽어볼 틈도 없이 연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영어숙제는 오답을 고치는 시간보다 상한 기분을 풀어주는 쪽으로 자주 흘렀습니다. 아이에게는 문제 하나보다 빨간 엑스가 더 크게 박히는 것 같았습니다.동그라미가 주는 힘요즘 영어유치원 숙제 수준을 보면 제가 풀어도 바로 답이 안 보이는 문제가 가끔 있습니다. 문장도 길고, 그림만 보고 고르기에는 애매한 문제도 섞여 있습니다. 7살 아이가 매일 이런 문제를 붙잡고 있다는 게 신기할 때도 있고, 조금 짠할 때도 있습니다.딸아이는 동그라미를 좋아합니다. 동그라미가 들어가면..
7살 딸의 영어유치원 숙제를 봐주다 보면 딸의 손이 자꾸 책 뒤 정답지 쪽으로 갔다.나는 정답지를 숨기지는 않았다.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자기 답을 먼저 읽은 다음 확인하자고 했다.숙제를 시작하면서 한 번 물었다.“정답지는 뭐 하는 거야?”딸이 말했다.“확인하는 거.”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숙제를 계속 옆에서 봐주다 보니 정답지보다 먼저 봐야 할 게 하나 있었다.딸이 답을 찾기도 전에 내가 답을 말하고 있었다.딸에게는 기다리라면서 나는 기다리지 못했다아이에게는 정답지를 바로 펼치지 말고 자기 답부터 보라고 했다.그런데 딸이 조금만 버벅이면 내가 먼저 끼어들었다.문제 뜻을 잘못 잡으면 바로 고쳐줬다.스펠링이 틀리면 내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답이 보이면 기다리지 못하고 말해버리는 때도 많았다...
비가 많이 오던 하원 시간, 영어유치원 로비에서 가장 또렷하게 들린 건 선생님 목소리보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였습니다.자동문은 계속 열렸다 닫혔고, 바깥 차 소리는 문이 열릴 때마다 로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젖은 신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아이들 가방 지퍼 소리, 보호자들이 아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한꺼번에 섞였고요. 원어민 선생님은 분명 영어로 짧게 안내하고 있었는데, 그 말이 로비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그냥 비 오는 날 흔한 하원길 소란인줄 알았습니다. 비 오는 날은 원래 정신 없거든요. 그런데 딸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려는데, 아이가 제 소매를 살짝 당겼습니다.“아빠, 아까 잘 안 들렸어.”그 말에 발이 잠깐 느려졌습니다. 로비 쪽을 다시 보니 선생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