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백에서 그 책을 처음 꺼냈을 때, 솔직히 너무 쉬워 보였습니다. 표지에 동물 한 마리, 안쪽에는 “I see a dog.” 한 줄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걸로 영어가 늘까 싶어서, 저는 그 자리에서 욕심을 부렸습니다. 쉬운 책이니 여러 번 반복하면 입에 붙겠지. 같은 책을 다시 펼치게 했고, “한 번만 더, 또박또박 읽어보자”고 했습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됐습니다.아이 얼굴은 두 번째 페이지에서 굳었습니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쉬운 책을 암기 숙제로 바꿔놓은 탓이었습니다. 처음엔 신나서 “I see a dog!” 하고 읽던 아이가, 같은 문장을 세 번째 읽을 때는 입을 거의 안 움직였습니다. 가장 쉬운 책을 가장 부담스러운 책으로 만든 사람은 결국 저였습니다...
어느 주부터 딸은 리딩북을 가방에서 꺼내도 책상 위에 바로 펼치지 않았습니다. 손끝으로 표지만 슬쩍 밀어두고 물을 마시러 가거나, 연필을 괜히 깎았습니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주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어려워서 피하는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책이 자기 쪽으로 당겨오지 않는 얼굴에 가까웠습니다.영어유치원을 보내고 나서 한동안은 원 수업과 리딩북만 챙기면 충분해 보였습니다. 수업도 있고 숙제 책도 나오니, 집에서는 그걸 확인만 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고 나니, 집 책장에 정작 딸 것이 한 권도 없다는 게 보였습니다. 전부 원에서 내려온 책, 해야 할 책뿐이었습니다.책이 자기 쪽으로 안 당겨오는 얼굴아이의 읽기 의욕은 책의 난이도보다 흥미와 선택에 더 붙어 있다고 합니다(Rea..
아침에 입고 간 바지가 비닐봉지에 담겨 가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옆에는 갈아입은 여벌옷과, 접힌 별 모양 칭찬표가 같이 있었습니다. 비닐봉지는 아이가 당황했을 시간을, 접힌 칭찬표는 선생님이 그 시간을 조용히 덮어주신 흔적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묻고 싶은 게 먼저 줄을 섰습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친구들이 봤어, 많이 창피했어, 선생님께는 뭐라고 했어. 그런데 아이는 칭찬표보다 제 얼굴을 먼저 봤습니다.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부터 살피는 눈이었습니다. 그 눈빛을 보고 줄 서 있던 질문을 그냥 삼켰습니다.영어유치원에서는 화장실 가는 것도 “Can I go to the bathroom?” 같은 문장으로 말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이는 그 문장을 알고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몇 번 해본 말..
친구는 독서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그런데 친구가 집에 온 뒤, 딸의 영어책은 조금 다른 물건이 됐습니다. 혼자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 됐습니다.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딸 입에서 한 친구 이름이 자주 나왔습니다. 밥 먹다가도 나왔고, 장난감을 만지다가도 나왔습니다. 그냥 같은 반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 집까지 이어지고 싶은 이름처럼 들렸습니다.스케줄을 맞춰 그 친구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책 읽히려고 부른 건 아니었습니다. 놀고, 간식 먹고, 다시 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친구가 오기 전부터 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장난감보다 책 바구니를 먼저 봤습니다. 평소 읽던 영어책을 아무렇게나 꺼낸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씩 넘겨보더니 따로 빼놓기 시작했습니다.웃긴 장면이 있는 책은 ..
영어유치원을 쉬게 된 아침아침부터 아이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열이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축 처져 있었다. 고민 끝에 영어유치원에 결석 연락을 했다. 하루 정도 쉰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쪽은 편하지 않았다.'진도를 놓치면 어떡하지?''다른 아이들은 수업을 듣고 있을 텐데.'부모라면 한 번쯤 해봤을 생각이었다.처음에는 집에서 책을 읽어주거나 교육 영상을 잠깐 보여주며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는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엄마, 코끼리는 왜 코가 길어?"그 질문 하나가 그날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책 대신 동물 이야기를 했다 "그럼 기린 목은 왜 길어?" "펭귄은 왜 못 날아?" "하마는 왜 입을 그렇게 크게 벌려?"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
영어유치원 상담표를 받아오면 이상하게 좋은 말보다 애매한 말이 먼저 보입니다. 잘하고 있다는 문장은 잠깐 기분이 좋고, 조금 더 지켜보자는 문장은 오래 남습니다. 저는 상담표를 펼쳐놓고도 아이 얼굴보다 종이 위 문장을 먼저 보고 있었습니다.그날도 그랬습니다. 가방에서 상담표를 꺼냈고, 아이는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적어준 문장을 읽었습니다. 발표, 참여, 친구 관계, 수업 태도. 단어는 다 익숙한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유치원에서는 잘한다고 적혀 있는데 집에서는 말이 줄어드는 날이 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는 발표를 한다는데 아빠 앞에서는 “몰라”로 끝나는 날도 있습니다. 상담표를 읽는 순간 저는 자꾸 둘 중 하나를 고르려고 했습니다. 유치원 모습이 진짜인지, 집 모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