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입고 간 바지가 비닐봉지에 담겨 가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옆에는 갈아입은 여벌옷과, 접힌 별 모양 칭찬표가 같이 있었습니다. 비닐봉지는 아이가 당황했을 시간을, 접힌 칭찬표는 선생님이 그 시간을 조용히 덮어주신 흔적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묻고 싶은 게 먼저 줄을 섰습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친구들이 봤어, 많이 창피했어, 선생님께는 뭐라고 했어. 그런데 아이는 칭찬표보다 제 얼굴을 먼저 봤습니다.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부터 살피는 눈이었습니다. 그 눈빛을 보고 줄 서 있던 질문을 그냥 삼켰습니다.딸은 화장실에 갈 때 쓰는 "Can I go to the bathroom?"이라는 문장을 알고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몇 번 해본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날 교실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친구는 독서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그런데 친구가 집에 온 뒤, 딸의 영어책은 조금 다른 물건이 됐습니다. 혼자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 됐습니다.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딸 입에서 한 친구 이름이 자주 나왔습니다. 밥 먹다가도 나왔고, 장난감을 만지다가도 나왔습니다. 그냥 같은 반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 집까지 이어지고 싶은 이름처럼 들렸습니다.스케줄을 맞춰 그 친구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책 읽히려고 부른 건 아니었습니다. 놀고, 간식 먹고, 다시 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친구가 오기 전부터 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장난감보다 책 바구니를 먼저 봤습니다. 평소 읽던 영어책을 아무렇게나 꺼낸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씩 넘겨보더니 따로 빼놓기 시작했습니다.웃긴 장면이 있는 책은 ..
영어유치원 상담표를 받아오면 이상하게 좋은 말보다 애매한 말이 먼저 보입니다. 잘하고 있다는 문장은 잠깐 기분이 좋고, 조금 더 지켜보자는 문장은 오래 남습니다. 저는 상담표를 펼쳐놓고도 아이 얼굴보다 종이 위 문장을 먼저 보고 있었습니다.그날도 그랬습니다. 가방에서 상담표를 꺼냈고, 아이는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적어준 문장을 읽었습니다. 발표, 참여, 친구 관계, 수업 태도. 단어는 다 익숙한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유치원에서는 잘한다고 적혀 있는데 집에서는 말이 줄어드는 날이 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는 발표를 한다는데 아빠 앞에서는 “몰라”로 끝나는 날도 있습니다. 상담표를 읽는 순간 저는 자꾸 둘 중 하나를 고르려고 했습니다. 유치원 모습이 진짜인지, 집 모습이..
영어유치원과 학원을 같이 다니기 시작한 첫 주였습니다.집에 돌아오니 식탁 위에는 영어유치원 워크북과 리딩북, 학원에서 가져온 프린트가 같이 올라왔습니다.딸은 양말 한쪽을 벗은 채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고, 저는 오늘 뭘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세고 있었습니다.그러다 작은 종이에 줄을 두 개 그었습니다.위에는 딸이 할 일.아래에는 아빠가 할 일.딸이 그 종이를 보더니 아빠도 할 일이 있냐는 식으로 물었습니다.적어놓고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학원을 하나 더 다니는 건 딸에게 수업 하나가 추가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처음에는 딸 시간표만 봤습니다병행을 결정할 때 제가 먼저 본 것은 수업이었습니다.영어유치원에서 배우는 것과 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얼마나 겹치는지, 학원을 하나 더 다니면 무엇을 더 ..
수요일 저녁이면 집 안 공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다음 날은 영어유치원 스피치 영상을 찍는 목요일이었습니다.원고는 늘 종이 한 장이었지만, 그 종이 한 장이 아이에게는 꽤 무거워 보였습니다. 첫 문장은 곧잘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첫 줄을 말하고 나면 딸 눈동자가 원고 위를 오래 오갔습니다. 읽을 수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외우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앞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길이 자주 끊겼습니다.저는 처음에 목소리로 도왔습니다.“다음 문장.”“여기 봐.”“다시 처음부터.”그 말들이 도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제가 말할수록 딸은 제 입을 봤습니다. 원고를 보는 것도 아니고, 자기 머릿속 문장을 찾는 것도 아니고, 제 입에서 정답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얼굴이 ..
숙제장에 hologram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이 눈은 단어보다 제 손에 들린 투명 비닐을 따라갔습니다. 사전에는 분명 뜻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곱 살 아이에게 “홀로그램은 빛으로 만든 입체 영상”이라고 말해도 표정이 밝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입체’도 ‘영상’도, 홀로그램만큼이나 또 다른 어려운 단어였으니까요.그래서 사전을 덮었습니다. 냉장고 옆에 있던 투명 비닐을 조명 아래로 가져와 아이 손에 쥐여줬습니다. 아이는 단어를 보기 전에 비닐 위의 반짝임을 먼저 봤습니다.여기서 설명을 바로잡을 부분이 있습니다. 비닐을 기울이며 본 반짝임만으로 실제 홀로그램을 보여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OpenStax의 홀로그래피 설명에서 다루는 홀로그램은 빛의 간섭 정보를 기록하고 재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날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