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랩북을 꺼내면 저는 늘 먼저 손이 갔습니다. 접힌 부분을 살짝 들어 올리고, 아이가 보기 좋게 펼쳐주고, 안에 뭐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책을 같이 읽는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면 제가 책을 대신 열어주고 있었던 날이 많았습니다.그날도 딸은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씻고 나온 뒤라 머리는 아직 조금 젖어 있었고, 잠옷 소매는 손등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저는 책장에서 얇은 플랩북 하나를 꺼내 아이 무릎 위에 올려뒀습니다. 책은 가벼웠지만 아이 손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표지를 한 번 쓸었습니다. 모서리를 만졌습니다. 접힌 부분 끝에 손가락을 대고도 바로 열지 않았습니다.예전 같으면 제가 바로 말했을 겁니다.여기 열어봐. 안에 뭐 있을까. 이건 무슨 그림 같아.그 말들이 나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
저녁마다 같은 장면이 반복됐습니다. 책장 앞에 선 딸은 새로 사둔 두꺼운 영어책 대신, 예전에 몇 번이나 읽었던 얇은 책을 먼저 꺼냈습니다. 표지가 닳은 동물 그림책이었습니다. 저는 그 옆에 있던 한 단계 높은 책을 권하고 싶었지만, 그날은 입을 다물고 지켜봤습니다.딸은 얇은 책을 펴더니 작은 벌레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Tiny bug." 문장이라기보다 혼잣말에 가까운 한마디였지만, 그 순간 아이가 책을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는 게 보였습니다.어려운 책을 펼친 날의 딸은 달랐습니다. 첫 페이지에서 목소리가 작아졌고, 페이지는 넘기는데 얼굴에서 장면에 대한 반응이 사라졌습니다. 다 읽고 "어떤 장면이 기억나?" 하고 물으면 그림 한 장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조금만 더 읽어보자" 했을..
딸이 처음으로 영어 문장을 자기 입으로 길게 말한 건, 책상도 수업도 아닌 거울 앞에서였습니다. 좋아하는 공주가 나오는 책을 옆에 펴 두고, 거울을 보며 그 공주가 된 것처럼 대사를 따라 했습니다. 그냥 그 장면이 되고 싶어서 입이 먼저 움직였습니다.딸은 공주를 정말 좋아합니다. 만화든 영화든 공주가 나오는 건 거의 다 찾아봤을 정도이고, 그것도 꼭 드레스를 입은 공주여야 합니다. 왜 그렇게 그 공주책을 자주 꺼내는지, 책장 이야기는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그 좋아하는 마음이 책장에서 멈추지 않고 거울 앞까지 간 거였습니다.거울 앞에서 딸이 제일 먼저 하는 건 턴입니다. 틈만 나면 빙글 돕니다. 특히 치마나 드레스를 입은 날엔 턴을 할 때마다 치마가 동그랗게 펼쳐지는데,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이 스스로도 ..
처음 방문했던 날영어 노출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주변에서도 영어도서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책이 많고 분위기가 좋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습니다.솔직히 기대했습니다.'우리 아이도 영어책을 좋아하게 될까?''영어를 공부가 아니라 놀이처럼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그런 마음으로 영어도서관을 찾았습니다.아이에게 좋은 경험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책장 앞에서 멈춰 있던 아이막상 도착하니 아이는 생각보다 조용했습니다.책장 앞에 서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만 할 뿐 선뜻 책을 꺼내지 않았습니다.다른 아이들은 익숙한 듯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괜히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이 책 한번 볼까?""이건 재미있을 것 같은데?"몇 번 권..
딸이 영어 그림책을 펼쳐놓고 집에 있던 작은 동물 인형을 가져왔다.인형을 책 위에 올려놓더니 그림 속 동물이 왜 숨어 있는지 자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그런데 딸의 설명은 한국말이었다.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영어 쪽으로 생각이 움직였다.영어책을 보고 있으니 지금 만든 이야기도 영어로 한번 말하게 해볼까 싶었다.아빠표 영어를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순간이 자주 생긴다.아이가 뭔가를 말하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연결하고 싶고, 영어책을 펼치면 영어 한 문장이라도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따라온다.그날도 그랬다.그런데 딸은 이미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그래서 영어로 바꿔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영어책이면 영어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나는 영어책을 읽는 시간을 꽤 단순하게 볼 때가 있었다.영어 문장을 ..
딸이 우주 영어책을 읽고 있었다.Mercury, Venus, Earth.행성 이름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읽었다. 발음을 못해서 책이 멈출 것 같지는 않았다.그런데 Earth가 들어간 문장 앞에서 손이 멈췄다.처음에는 단어 뜻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Earth는 조금 전에도 읽었다. 단어를 못 읽는 게 아니었다.책에 나온 태양과 행성들이 어디에 있고, 그중 우리가 사는 Earth가 어디에 놓이는지 머릿속에서 아직 자리가 안 잡힌 것 같았다.나는 바로 설명하려고 했다.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고, 우리가 사는 곳이고, 물도 있고….입을 열었다가 멈췄다.말로 계속 설명하면 오히려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그래서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가운데 동그라미 하나를 크게 그렸다.“Sun.”그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