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영어책을 또박또박 읽으면 부모는 쉽게 안심합니다. 발음이 굴러가고 문장이 끊기지 않으면, 저 안에서도 이야기가 같이 굴러가고 있겠거니 싶어집니다. 그날 정수기 물 떨어지는 틈에 딸이 얇은 책 한 페이지를 읽을 때도 저는 그랬습니다. 숙제장을 덮고 다음 수업을 기다리던 짧은 시간이었고, 또박또박한 읽기 소리에 마음이 잠깐 풀렸습니다.그래서 책을 덮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파란 풍선이 왜 나뭇가지에 걸렸느냐고. 아이 눈은 페이지가 아니라 옆에 둔 종이컵으로 갔습니다. 발음은 분명히 지나갔는데 이야기는 아직 붙지 않은 얼굴이었습니다. 읽는 소리와 이해하는 일이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저는 그 짧은 눈길에서 봤습니다.읽는 소리는 부모를 먼저 안심시킨다사실 속은 건 아이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아이는 시킨 ..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현관 앞에 택배상자 세 개가 쌓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씻기 전이었고, 저는 박스를 접어야 했습니다. 영어를 하려고 만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박스가 많았습니다.아이 손에는 얇은 영어 그림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제가 읽자고 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낮에 읽다 만 탈것 그림책이었고, 아이가 종이가방 안에 넣어 들고 나왔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습니다. 그 순간 “그럼 내려가서 한 번 읽어볼까?”라고 말하면 바로 숙제가 될 것 같았습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는 거울을 봤습니다. 책은 종이가방 안에 반쯤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박스를 발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영어는 한마디도 안 나왔습니다.책을 펼치기 전에 나온 말지하 1층 분리수거장 앞에서 박스를 접는데..
영어책을 많이 사두면 아이가 알아서 꺼내 볼 줄 알았습니다.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책장에 꽂힌 책보다 바닥에 살짝 기대어 둔 책에 손이 더 자주 갔습니다.처음에는 책 내용만 봤습니다.단어가 쉬운지, 그림이 선명한지, 아이가 좋아할 만한 주제인지.나중에 보니 책보다 자리가 더 중요했습니다.특히 컨셉북은 그랬습니다.컨셉북은 줄거리 긴 책과 조금 다릅니다. 몸동작, 기분, 색깔, 가족, 동물, 날씨처럼 한 주제 안에서 단어와 그림이 묶여 있는 책입니다.이런 책은 아이가 각 잡고 앉아서 읽기보다, 지나가다 보고 한 장 열어보고 몸으로 따라 할 때 더 잘 붙었습니다.그래서 어느 날부터 우리 집에서는 영어책을 책장 기준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집 안에서 아이가 멈추는 자리, 손이 닿는 높이, 몸이 움직이는 방향을 같이..
빨래바구니를 바닥에 엎어놓고 딸과 양말을 나누던 평범한 저녁이었습니다. 책도, 패드도, "이거 영어로 뭐게?" 같은 퀴즈도 없었어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짝을 맞추는 중이었습니다. 딸이 분홍 양말 한 짝을 들고 짝을 찾다가, 옆에 파란 줄무늬 양말을 놓더니 작게 물었습니다. "Different sock?" 색이 다르니 아이 눈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한국말 '다른'이 영어에선 한 단어로 안 끝난다는 게 새삼 보였습니다.그때 우리가 하던 일은 색을 고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짝을 맞추는 일이었죠. 그래서 분홍 양말의 진짜 짝을 찾아 옆에 놓고 짧게 말해줬어요. "This is the other sock." 딸은 두 짝을 나란히 두고 보더니, 같은 색에 같은 무늬인 걸 확인하고..
영어유치원 상담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 남은 건 상담사의 설명도 비용표 숫자도 아니었습니다. 상담 내내 테이블 구석에서 혼자 자석 블록을 붙이던 딸이었습니다. 노란 조각과 파란 조각을 잇고 긴 조각 하나를 세우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작게 말했습니다. “This is a bus stop.” 영어로 말해 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아이가 자기 놀이에 먼저 붙인 한마디였습니다.상담사는 원어민 담임과 초등 연계, 레벨 관리에 졸업 후 로드맵까지 빠르게 짚어 줬고, 저는 그사이 손가락으로 비용을 셈하고 있었습니다. 월 얼마, 교재 얼마, 차량비 얼마. 설명이 한 줄 넘어갈 때마다 마음속 숫자가 따라 커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가장 또렷하게 남은 장면은 표에 적힌 숫자가 아니라, 그 모든 말이 ..
나는 그날 아이 영어를 읽은 게 아니라 채점하고 있었다.영어유치원 가방에서 접힌 프린트 한 장이 나왔습니다. 숙제장인 줄 알았는데 얇은 영어 기사였습니다. 글자는 꽤 많았고, 사진은 한쪽에 작게 들어가 있었습니다.제가 먼저 본 것은 글자였습니다.단어를 아는지, 문장을 읽을 수 있는지, 내용을 이해했는지, 이 정도 기사면 지금 아이 수준에 맞는지.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딸은 달랐습니다.글자를 먼저 훑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봤습니다. 사진 속에는 길 위에 남은 흔적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발자국 같기도 했고, 지나간 자국 같기도 했습니다.딸은 손가락으로 사진 한쪽을 짚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습니다.그리고 말했습니다.“Maybe it is lost.”그 말을 듣고도 저는 바로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