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퇴근하기 전에 아이에게 들려줄 영어 문장 하나를 준비합니다. 매일 합니다. 거창한 건 없습니다. 오늘은 날이 너무 더워서, 집에 들어가면 이렇게 말해야지 하고 정해뒀습니다.문을 열고 아이를 보자마자 영어로 말을 걸었습니다."It was so hot today. Weren't you hot too? On a day like this, how about ice cream for an evening snack?"그랬더니 아이가 눈이 동그래져서 이렇게 답했습니다."I missed you, Daddy! That's such a good idea. It was so hot at kindergarten today, and I said I wished I could have ice cream for an even..
저는 오래전부터, 책을 읽는 사람이 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어 왔습니다. 제가 대단한 독서가라서 품게 된 믿음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책과 그리 가깝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믿음만은 이상하게 단단했습니다. 새로운 걸 만들고, 다른 길을 내고, 끝내 무언가를 바꾸는 사람들 뒤에는 늘 읽는 시간이 있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그 믿음을 요즘 일곱 살 제 딸에게서 다시 봅니다. 책 읽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말이 말은 거창하게 들리지만, 제게는 아주 단순한 뜻입니다. 읽는 사람은 자기 머릿속에 남의 생각을 들여놓을 줄 압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만나보지 못한 사람,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책 한 권으로 잠깐 살아 봅니다. 읽는 동안 우리는 잠깐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빌리는 셈입니다..
우리 집은 보통 집과 조금 다릅니다. 흔히 아이는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데, 우리 딸은 아빠인 저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어요. 아내가 승무원이라 며칠씩 비행을 나가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가 거의 보통 집 엄마 역할까지 하고 있습니다. 밥 먹이고, 씻기고, 영어유치원 숙제를 챙기고, 재우는 일이 대부분 제 몫이에요. 원 준비물을 챙기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까지 거의 제가 합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제는 이게 우리 집의 보통이 됐습니다.아내는 그게 늘 마음에 걸리나 봅니다. 다른 집과 달리 딸이 엄마 얼굴을 며칠씩 못 보고, 외국으로 비행을 나가 있는 동안 서로 또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그 미안함을 아내는 가방으로 채웁니다. 비행을 갈 때마다 딸을 위한 선물을, 작든 크든 꼭 하나는 ..
퇴근길에 운전하면서 그날 저녁 순서를 머릿속으로 먼저 돌렸습니다.브릭스 숙제 30분, 10분 쉬기, 워크북, 간식, 수학 숙제.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세 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습니다.그런데 집에 도착하면 계획은 자주 틀어졌습니다. 10분이면 끝날 것 같았던 영어유치원 숙제가 한 문제에서 막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날도 있었습니다.영어유치원은 원비만 감당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직접 보내고 나서 보니 우리 집에서 더 크게 들어간 것은 하원 후 부모의 시간이었습니다.저녁 7시부터 10시까지면 충분할 줄 알았습니다영어유치원을 보내기 전에는 원비와 커리큘럼, 원어민 선생님, 리딩 레벨을 먼저 봤습니다. 아이가 원에 다녀온 뒤 가족의 저녁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구체적으로 계산하지 못했습니다.우리 집에서는..
우리 딸은 먹는 걸 참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사탕이나 젤리 같은 작은 군것질거리를 제일 반겨요. 다른 건 몰라도 공부 시간에 간식 하나 까먹는 그 순간만큼은, 아이 얼굴에 작은 행복이 번지는 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 집에서 간식은 절반쯤 미끼였습니다. “이거 다 읽으면 하나 더 먹자” 하는 식으로, 숙제를 넘기는 데 쓰는 도구에 가까웠어요. 그날도 책상 옆에 멘토스 몇 알이 올라와 있었고, 저는 그게 그냥 오늘치 숙제를 굴러가게 할 윤활유라고만 생각했습니다.그런데 리딩북을 펴려는데, 딸이 사탕을 입에 넣기 전에 손바닥에 알을 쭉 펼쳐 놓고 저를 불렀습니다.“이거 봐봐, 아빠.”색깔이 알록달록한 레인보우 멘토스였어요. 영어유치원 선생님한테 선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끊지 말고 다 쏟아내길..
딸은 영어책을 또박또박 잘 읽습니다. 한 페이지를 막힘없이 넘기길래 "What does it mean?"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 자주 "몰라"입니다. 읽기는 분명히 됐는데 뜻은 비어 있는 거죠. 이건 우리 집만의 일은 아닐 겁니다. 영어책을 읽히는 집이라면 한 번쯤 또박또박한 읽기 뒤에 돌아오는 "몰라"를 들어봤을 거예요. 또박또박한 읽기 소리에 제가 한 번 속았던 일이 있은 뒤로, 저는 아이 입보다 얼굴을 먼저 보게 됐습니다. "몰라"가 나오기 직전, 얼굴이 먼저 말해주거든요.이해가 막히면 마음부터 꺾입니다 아이는 모르는 게 나오면 어른보다 훨씬 빨리 무너집니다. 특히 우리 딸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문장 앞에서 바로 얼굴이 죽습니다.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빛이 흐려지면서, "이건 또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