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숙제장에 빨간 엑스를 치자 얼굴빛이 바로 어두워졌습니다. 맞으면 동그라미, 틀리면 엑스. 어른에게는 빠르고 깔끔한 채점 방식인데, 아이에게는 그 표시가 문제보다 크게 들어갔습니다. 다시 읽어볼 틈도 없이 연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영어숙제는 오답을 고치는 시간보다 상한 기분을 풀어주는 쪽으로 자주 흘렀습니다. 아이에게는 문제 하나보다 빨간 엑스가 더 크게 박히는 것 같았습니다.동그라미가 주는 힘요즘 영어유치원 숙제 수준을 보면 제가 풀어도 바로 답이 안 보이는 문제가 가끔 있습니다. 문장도 길고, 그림만 보고 고르기에는 애매한 문제도 섞여 있습니다. 7살 아이가 매일 이런 문제를 붙잡고 있다는 게 신기할 때도 있고, 조금 짠할 때도 있습니다.딸아이는 동그라미를 좋아합니다. 동그라미가 들어가면..
부산 서면 글로벌빌리지 영어도서관에 딸아이와 다녀왔습니다. 아이 나들이도 시킬 겸, 영어책이 많이 모인 공간은 어떤 분위기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어유치원에서도 책을 보지만, 유치원 안 책장과 도서관 서가는 공기가 다릅니다. 휴대폰 화면으로 넘기는 영어책과도 다르고요. 그날 아이가 영어책을 많이 읽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애매합니다. 읽은 양보다 더 오래 본 건 아이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어디서 빨라지고, 어느 책 앞에서 손이 가고, 무엇을 더 오래 기억하는지요.입구 5분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조용했습니다. 아이는 그 조용함보다 책이 많은 공간을 더 크게 본 듯했습니다. 의자도 있고, 아이들이 앉아 있는 자리도 있으니 큰 놀이방처럼 느꼈나 봅니다.몇 걸음 들어가자 몸이 빨라졌습니다. 뛰려는 기색이 보여서 ..
젤리 하나를 책 옆에 두고 딸아이에게 영어책을 읽히려 한 적이 있습니다. 몇 장 보면 젤리 하나, 끝까지 보면 주말 보상 하나. 지금 돌아보면 그건 방법이 아니라 제 욕심이었습니다. 영어유치원에 보내니 책도 많이 읽으면 좋겠고, 추천 도서를 책장에만 꽂아두기 아까웠던 마음이 앞섰던 거죠. 정작 그 방법이 책을 더 멀어지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가장 먼저 무너진 건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는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이제 먹어도 돼?"라고 물었습니다. 책 속 문장보다 약속한 젤리가 더 크게 움직였고, 읽는 시간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시간이 아니라 젤리까지 버티는 시간이 됐습니다. 보상을 걸면 아이가 책상 앞에 더 오래 앉는 건 맞습니다. 다만 오래 앉아 있는 것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
7살 딸의 영어유치원 숙제를 봐주다 보면 딸의 손이 자꾸 책 뒤 정답지 쪽으로 갔다.나는 정답지를 숨기지는 않았다.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자기 답을 먼저 읽은 다음 확인하자고 했다.숙제를 시작하면서 한 번 물었다.“정답지는 뭐 하는 거야?”딸이 말했다.“확인하는 거.”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숙제를 계속 옆에서 봐주다 보니 정답지보다 먼저 봐야 할 게 하나 있었다.딸이 답을 찾기도 전에 내가 답을 말하고 있었다.딸에게는 기다리라면서 나는 기다리지 못했다아이에게는 정답지를 바로 펼치지 말고 자기 답부터 보라고 했다.그런데 딸이 조금만 버벅이면 내가 먼저 끼어들었다.문제 뜻을 잘못 잡으면 바로 고쳐줬다.스펠링이 틀리면 내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답이 보이면 기다리지 못하고 말해버리는 때도 많았다...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에 나들이를 가면 딸은 놀이터부터 찾습니다. 바다 쪽 바람이 차가운 날에도, 한여름처럼 땀이 나는 날에도 놀이기구 앞에서는 금방 뛰기 시작합니다. 공부와 숙제 사이에 눌려 있던 몸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탁 풀리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낯선 친구가 가까이 오면 아이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집에서는 말도 많고 장난도 많은데, 외국인 아이와 마주치면 입이 작아집니다. 영어 단어보다 첫마디를 어디서 어떻게 꺼내야 할지가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마린시티 놀이터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건 외국인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관광지에서 잠깐 스쳐 가는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와 아이들이 보입니다. 딸에게 그 장면은 영어 교재 속 상황이 아니라 바로 옆..
아이 운동화 앞코가 흰 선 밖으로 반쯤 나가 있었습니다.아파트 후문 쪽,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오른쪽에서 우회전하려는 차 한 대가 천천히 굴러오고 있었고, 신호등은 곧 바뀔 듯했습니다. 아이는 이미 건널 생각으로 몸이 앞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습니다.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세게 움켜쥔 건 아닌데, 오른쪽에서 굴러오는 차를 보자 손바닥 안쪽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아이는 신호등을 보고 있었고, 저는 차바퀴를 보고 있었습니다. 차가 완전히 멈춘 건지, 아직 굴러오는 중인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 몇 초가 길었습니다.“뒤로.”말이 먼저 정리된 게 아니라, 한국말이 그냥 튀어나왔습니다. 아이가 저를 봤습니다.그리고 바로 짧게 붙였습니다.“Behind the curb.”흰 선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