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ton missing?”딸아이 책을 보다가 갑자기 말을 합니다. 옆에 앉아 있던 저는 뭔가 설명하려다 말을 삼켰습니다. 책장은 아이가 넘기고 있었고, 질문도 아이 쪽에서 나왔습니다.글자가 한 줄도 없는 그림책.곰 인형은 빨간 조끼를 입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인 조끼에는 단추가 세 개 달려 있었는데,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두 개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이 눈이 조끼 가운데쯤에서 잠깐 멈췄습니다.앞 장으로 돌아간 손가락이 단추를 하나씩 짚었습니다. 다시 다음 장. 조끼 가운데 비어 있는 자리에 손끝이 갔고, 아이는 그 자리를 한 번 누르듯 짚고 나서 저를 봤습니다.“Button missing?”그 말을 듣자마자 “The button is missing”이라고 고쳐줄 수도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마 ..
비가 많이 오던 하원 시간, 영어유치원 로비에서 가장 또렷하게 들린 건 선생님 목소리보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였습니다.자동문은 계속 열렸다 닫혔고, 바깥 차 소리는 문이 열릴 때마다 로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젖은 신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아이들 가방 지퍼 소리, 보호자들이 아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한꺼번에 섞였고요. 원어민 선생님은 분명 영어로 짧게 안내하고 있었는데, 그 말이 로비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그냥 비 오는 날 흔한 하원길 소란인줄 알았습니다. 비 오는 날은 원래 정신 없거든요. 그런데 딸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려는데, 아이가 제 소매를 살짝 당겼습니다.“아빠, 아까 잘 안 들렸어.”그 말에 발이 잠깐 느려졌습니다. 로비 쪽을 다시 보니 선생님이..
원복 카디건 하나가 우리 집 가방에 들어와 있었습니다.딸아이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 안쪽 라벨에 친구 이름이 적혀 있었고, 딸아이는 보자마자 그 이름을 바로 불렀습니다.“아, 이거 친구 거야.”너무 빨랐습니다. 같은 반 친구라서 이름을 아는 건 당연한데, 그 이름이 아이 입에서 너무 쉽게 지나갔습니다. 저는 카디건을 바로 접지 못했습니다.라벨에는 영어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손끝으로 라벨을 잡아당겨 한 번 더 봤습니다. 저는 그 옆에서 잠깐 늦었습니다. 이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게 맞는지, 교실에서는 어떻게 들리는지, 친구는 자기 이름을 어떤 소리로 듣고 있는지. 그런 생각이 라벨 앞에서 잠깐 걸렸습니다.친구 이름을 틀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발음을 검사하려는 것도 아니었고요. 다만 ..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가방에서 생일 초대장이 나오는 날이 있습니다. 반가운 한편, 하필 그날 다른 일정이 있으면 난감해집니다. 못 가는 걸 아이가 친구에게 영어로 어떻게 전하게 할지, 저도 한참 고민했습니다.우리 집은 아내가 승무원이라 집에 오는 날이 들쭉날쭉합니다. 초대장에 적힌 날이 마침 아내가 며칠 만에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친구 생일까지 겹쳐서, 못 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기까지 아이도 저도 며칠이 걸렸습니다. 그날 아이에게 시킨 말을 정리해 둡니다.RSVP가 뭔지부터초대장 아래쪽 작은 글자에 RSVP가 적혀 있습니다. 어려운 약자가 아니라 "올 건지 안 올 건지 알려달라"는 표시입니다. 파티 장소나 시간보다 사실 이 네 글자가 더 중요합니다. 초대한 친구가 ..
지하주차장에서 차 시동을 끄려는 때였다.영어유치원 단톡방에 숙제사진이 올라왔다.리딩북 몇 권.빨간 체크가 찍힌 워크북.가지런히 놓인 숙제장.사진은 조용했는데 내 머릿속은 바로 바빠졌다.우리 아이는 오늘 몇 권 했지.워크북은 어디까지 했지.발표 준비까지 하면 시간이 되나.그때 뒷좌석을 봤다.딸은 아직 가방 지퍼를 잡고 있었다.숙제장을 꺼낸 것도 아니었고, 오늘 리딩북을 몇 권 읽었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나는 다른 집 숙제사진 한 장을 보고 우리 집 저녁부터 계산하고 있었다.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없었던 질문이 생겼다단톡방에 올라온 건 다른 집에서 찍은 숙제사진이었다.그런데 사진을 보자마자 나는 그 집 숙제보다 우리 딸부터 떠올렸다.리딩북을 보면서 우리 아이가 오늘 몇 권 했는지 궁금해졌고, 워크북 ..
딸 영어책을 옆에서 같이 보다가 제가 먼저 막혔습니다.아이 책인데 몇 번을 읽어도 무슨 상황인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습니다.평소 같으면 아빠니까 어떻게든 설명해주려고 했을 겁니다.그런데 이날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결국 딸과 관련 영상을 같이 찾아봤습니다.영상을 보다가 제가 먼저 이해했습니다.“아, 이런 거였어?”그러자 딸이 저를 보면서 물었습니다.“아빠도 책만 봤을 때는 몰랐어? 영상 보니까 이제 알겠어?”웃으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영어책을 설명해주려고 옆에 앉은 아빠가 오히려 먼저 도움을 받은 날이었습니다.아빠니까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딸과 영어책을 읽을 때 저는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쪽에 앉습니다.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설명해주고, 문장이 어렵다고 하면 다시 읽어보고, 그림을 보면서 무슨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