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아이의 한국어가 또래보다 느린 것 같으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단순합니다. “영유 때문인가.” 같은 걱정을 해 본 부모 입장에서 자료와 전문가 의견을 찾아 정리해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단순한 답은 대체로 틀립니다.영유 때문에 한국어가 늦는 걸까영어유치원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국어가 늦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화여대 언어병리학과 임동선 교수는 영어 교육기관에 다녔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 늦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언어 지연의 뿌리는 환경보다, 뇌의 집행기능 같은 여러 기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생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즉 “영유를 끊으면 해결된다”는 기대도, “영유 보내서 망쳤다”는 자책도 둘 다 성급합니다. 다만 발달 단계에 맞지..
아내가 장거리 비행을 가면 아이는 며칠씩 엄마를 못 봅니다. 길면 일주일 가까이 부산 집에는 엄마 자리가 비어요. 그 사이에도 영어유치원 숙제는 그대로 옵니다. 스피킹 대본, 라이팅 숙제, 리딩북, 단어장까지 날짜에 맞춰 가방 안에 들어 있습니다.저는 식자재영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이고, 영어유치원 가방을 엽니다. 엄마가 없는 날에는 그 가방을 제가 더 자주 봅니다. 알림장을 보고, 리딩북을 빼고, 워크북을 확인하고, 스피킹 대본을 펼칩니다. 여기서 욕심을 내면 밤이 금방 무거워져요. 그래서 우리 집은 그 일주일을 한 번에 해내는 쪽보다, 하루씩 잘라서 넘기는 쪽으로 굴러갑니다. 엄마 없는 주에는 가방을 작게 엽니다아내는 승무원이라 비행 스케줄에 따라 며칠씩 서울 쪽 숙소에서 지..
딸아이 숙제장에 빨간 엑스를 치자 얼굴빛이 바로 어두워졌습니다. 맞으면 동그라미, 틀리면 엑스. 어른에게는 빠르고 깔끔한 채점 방식인데, 아이에게는 그 표시가 문제보다 크게 들어갔습니다. 다시 읽어볼 틈도 없이 연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영어숙제는 오답을 고치는 시간보다 상한 기분을 풀어주는 쪽으로 자주 흘렀습니다. 아이에게는 문제 하나보다 빨간 엑스가 더 크게 박히는 것 같았습니다.동그라미가 주는 힘요즘 영어유치원 숙제 수준을 보면 제가 풀어도 바로 답이 안 보이는 문제가 가끔 있습니다. 문장도 길고, 그림만 보고 고르기에는 애매한 문제도 섞여 있습니다. 7살 아이가 매일 이런 문제를 붙잡고 있다는 게 신기할 때도 있고, 조금 짠할 때도 있습니다.딸아이는 동그라미를 좋아합니다. 동그라미가 들어가면..
부산 서면 글로벌빌리지 영어도서관에 딸아이와 다녀왔습니다. 아이 나들이도 시킬 겸, 영어책이 많이 모인 공간은 어떤 분위기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어유치원에서도 책을 보지만, 유치원 안 책장과 도서관 서가는 공기가 다릅니다. 휴대폰 화면으로 넘기는 영어책과도 다르고요. 그날 아이가 영어책을 많이 읽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애매합니다. 읽은 양보다 더 오래 본 건 아이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어디서 빨라지고, 어느 책 앞에서 손이 가고, 무엇을 더 오래 기억하는지요.입구 5분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조용했습니다. 아이는 그 조용함보다 책이 많은 공간을 더 크게 본 듯했습니다. 의자도 있고, 아이들이 앉아 있는 자리도 있으니 큰 놀이방처럼 느꼈나 봅니다.몇 걸음 들어가자 몸이 빨라졌습니다. 뛰려는 기색이 보여서 ..
젤리 하나를 책 옆에 두고 딸아이에게 영어책을 읽히려 한 적이 있습니다. 몇 장 보면 젤리 하나, 끝까지 보면 주말 보상 하나. 지금 돌아보면 그건 방법이 아니라 제 욕심이었습니다. 영어유치원에 보내니 책도 많이 읽으면 좋겠고, 추천 도서를 책장에만 꽂아두기 아까웠던 마음이 앞섰던 거죠. 정작 그 방법이 책을 더 멀어지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가장 먼저 무너진 건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는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이제 먹어도 돼?"라고 물었습니다. 책 속 문장보다 약속한 젤리가 더 크게 움직였고, 읽는 시간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시간이 아니라 젤리까지 버티는 시간이 됐습니다. 보상을 걸면 아이가 책상 앞에 더 오래 앉는 건 맞습니다. 다만 오래 앉아 있는 것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
우리 집 정답지 규칙은 작은 말 몇 개에서 시작했습니다.영어유치원 숙제를 보다가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됐고, 나중에는 거의 허가서처럼 굳어진 순서가 생겼습니다.이름을 붙이면 이렇습니다.정답지 사용 허가서.아이 이름을 쓰고, 날짜를 적고, 정답지를 열기 전 해야 할 일을 적어도 될 만큼 단순한 규칙이었습니다.영어유치원 숙제를 하다 보면 정답지는 늘 애매한 물건입니다.책상 위에 두면 아이 손이 빨라지고, 치워두면 아이 눈이 계속 그쪽을 찾습니다.부모는 스스로 풀었으면 좋겠고, 아이는 틀리기 전에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퇴근하고 들어와 씻고, 저녁 먹고, 다시 숙제장 앞에 앉는 밤이면 부모 마음도 넉넉하지 않습니다.아이가 정답지부터 찾으면 속에서 말이 올라옵니다.“네가 풀어야지.”“답부터 보면 어떡해.”“이러면 ..
